인권의 기본은 ‘약자와 소수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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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된 입장의 권리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을 때 누가 양보해야 할까. 인권의 정신은 약자와 소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라면, 갑이 을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곳이 면 단위라 읍내로 나가려면 편도 1차선의 차도가 유일하다. 공장이 들어서고, 요양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오가는 차들은 눈에 띄게 늘었건만 20년 전부터 넓힌다던 차도는 여전히 1차선 그대로이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면 여간 붐비는 게 아니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읍내의 도서관에 강의가 있어 저녁 무렵에 차를 몰고 나가는데, 차도에 늘어선 차들의 행렬이 여느 때보다 더 길었다. 차들은 가다가 서기를 반복하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어디에서 사고가 났나 싶어 차창을 열고 길게 목을 빼고 내다보지만 꼬리를 문 차들의 행렬뿐이다. 강의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어디로 돌아갈 길도 없는 처지이니 그저 차 안에서 발을 구르며 조바심을 낼 뿐이다.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조금씩 가다보니, 줄 지어 선 행렬 앞에 가는 전동차가 보였다. 몸이 불편한 분이 타는 전동 휠체어였다.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전동차 때문에 차들이 밀린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불평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니, 몸이 불편한 분이 다 늦은 저녁에 무얼 하러 나왔을까. 겨우 차례가 되어 마주 오는 차가 없는 틈에 전동차를 추월해 뻥 뚫린 길을 내달렸다. 이미 늦어버린 강의 장소로 달려가면서 푸념을 늘어놓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 길을 나만 빨리 가야 한다고 생각할까. 몸이 불편한 분도 읍내에 빨리 가야 할 용무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분도 갑자기 몸이 아파 읍내에 급히 약을 사러 갈 수도 있으며, 새로 이사할 집의 주인과 중요한 계약이 있을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나러 열차역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인권은 역지사지와 약자 우선에서 출발한다. 2014년 11월 20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후생동 강당에서 동성애 반대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를 저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인권은 역지사지와 약자 우선에서 출발한다. 2014년 11월 20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후생동 강당에서 동성애 반대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를 저지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소수의 권리를 무시하는 다수는 폭력
인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려낸다.

인권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가난하더라도,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적 취향이 색다르더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권리가 바로 인권이다. 그것은 다수의 권리를 내세워서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수많은 사람이 출퇴근 시간에 길이 막혀 불편을 겪는다고 장애를 가진 분의 느린 전동차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인권의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말하지만, 소수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다수결은 전제적이며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은 소수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다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장애인만 사람이냐, 출근에 늦어 시말서를 써야 하는 사람의 권리는 무시되어도 되느냐는 물음 자체가 비인권적이다. 인권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약자 우선에서 출발한다. 권리와 권리가 맞설 때는 약자를 우선한다는 정신이야말로 사람이 약육강식의 짐승이 아닌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인권은 약자 우선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에서 얻어질 수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도 읍내에 나갈 용무가 있다는 생각, 몸이 불편하니까 안전하게 차도를 다닐 수 있도록 더욱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해 보는 것이 인권이다.

우리 사회에서 도출되는 수많은 갈등은 서로 다른 권리의 충돌에서 비롯되고 있다. 노동자와 기업주, 보수와 진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자국민과 외국 이주자, 국가와 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빈민, 대형 양판점과 재래시장…… 이렇게 상반된 입장의 권리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을 때 누가 양보해야 할까. 인권의 정신은 약자와 소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라면, 갑이 을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의 비극은 다수의 권리를 위해 소수의 권리는 제한되는 것이 마땅하며, 갑의 이익을 위해 을은 희생되어야 하며, 강자는 약자를 제 능력대로 자유로이 처리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유 민주’의 횡포에서 기인하고 있다.

새해를 높은 굴뚝에서, 전광판에서 찬바람을 맞이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공익을 앞세운 전력회사에 맞서 목에 쇠사슬을 매고 절규하는 밀양의 할머니들이 있다. 10년째 거리로 내몰려 땅바닥을 오체투지로 기며 눈물로 호소하는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이 있다. 연유도 모른 채 찬 바다에 잠긴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해 삭풍이 부는 팽목항에서 절규하는 세월호 실종자의 가족들이 있다.

그릇된 ‘자유 민주’의 횡포
어디 그뿐이랴. 돌아보면 이 나라의 후미진 골짜기마다 국가 폭력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거창에서, 제주에서, 노근리에서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죽음을 맞은 원혼들이 아직도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어두운 지하에 묻혀 있다.

그 학살의 장본인 가운데 하나인 서북청년단이 장롱에서 제복을 꺼내 차려입고 거리에 나서서 당당히 부활을 선언하고, 어린 자식을 잃은 세월호의 유족들이 밥을 굶는 광장에서 통닭을 뜯는 이들은 있어도, 인권은 이 나라에 없다. 사상이 다르다고 정당을 해산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비인권의 상징인 국보법을 앞세워 가택을 수색하고 구금하는 짓을 버젓이 반복하고 있는 이 나라에 인권은 없다.

이 나라가 북한의 인권을 걱정하고 나섰다. 북한 정권의 비인간적 처우와 독재를 비난하는 전단을 풍선에 매달아 띄우고, 유엔에 북한의 인권 해결을 요구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동포애를 떠나, 사람의 보편적인 권리로서 북한의 인권 문제도 관심 깊게 지켜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할 일이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일수록 제 나라의 소수와 약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돌아보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일부 보수단체나 개인의 입장이라면 모르겠지만, 국가와 정부의 입장이라면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겉으로는 인권을 말하지만 내심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대결의 책략이 아닌지, 인권마저 그러한 대결과 분단의 무기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쟁의 폭력과 어떻게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의 나라 인권을 걱정하고 비난하기 전에 굴뚝에 올라가 소리치는 노동자와 팽목항에서 절규하는 세월호 유족들에게 달려가 그 눈물 젖은 손을 쥐는 것이 참된 인권의 노력이 아니겠는가.

사돈 남 말한다는 속담이 있다. 사돈에게 대놓고 나무라기 어려워 남에게 하는 것처럼 나무라니, 듣던 사돈이 덩달아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데서 온 관용어이다. 자기 허물은 모르는 채 남의 험담을 하는 걸 빗대어 하는 말이다.

새해 벽두에 내어놓기는 거북한 말이지만, 지난해에 교수들이 선정한 ‘지록위마’(指鹿爲馬)에 이어 새해를 이 말로 여는 심정도 편하지 않다.

<이시백(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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