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그래도 아직은 울음을 그칠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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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 “큰 위안… 그러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눈물 거둘 수 없어”…

900km 도보순례 십자가 ‘세월호 슬픔’ 오래 기억하게 로마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위치한 길이다.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이지만 흔히 ‘십자가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빌라도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길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기자는 지난해 5월, 이곳을 방문했다. 성경의 기록에 따라 십자가의 길은 ‘14처’로 구성되어 있다. 여정의 출발지인 ‘제1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이다. ‘2처’는 면류관을 쓰고 구경나온 군중들의 희롱을 당한 곳이다. ‘3처’는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던 예수가 처음으로 쓰러진 곳이다.

‘304명 착한 영혼 위해’ 십자가 진 아버지
구경꾼 모두가 예수를 조롱했던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쓰러진 예수 대신 십자가를 졌다. 예수의 수난을 같이 한 사람은 또 있다. 베로니카다. 피땀으로 얼룩진 예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줬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진 곳은 ‘5처’다.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은 곳이 14처 중 ‘6처’다. 5처에는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가 있다. 

세월호 십자가 도보순례단의 마지막 일정인 진잠체육관에서 대전월드컵경기장까지의 순례길을 세월호 유가족 두 아버지가 걷고 있다. 사진 왼쪽이 단원고 2학년 4반 故 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이고 오른쪽이 2학년 8반 故 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다. | 정지윤기자

세월호 십자가 도보순례단의 마지막 일정인 진잠체육관에서 대전월드컵경기장까지의 순례길을 세월호 유가족 두 아버지가 걷고 있다. 사진 왼쪽이 단원고 2학년 4반 故 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이고 오른쪽이 2학년 8반 故 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다. | 정지윤기자

교회 앞은 좁은 골목길이다. 바로 교회 건너편에는 옷가게가 있다. 6처 자리에는 수녀원이 들어서 있다. ‘십자가의 길’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재현된 곳이다. 어느 한 종교가 독점하는 곳도 아니다. 예수가 세 번째로 쓰러진 ‘9처’에는 콥트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 앞에는 목제 십자가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십자가의 길’을 찾은 사람들이 실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난을 느껴보라는 뜻일 것이다.

‘아이들의 소중한 씨앗이 세상에 뿌리내리기를. 304명의 착한 영혼을 위하여.’ 세월호 유족 김학일(52·단원고 2학년 4반 김웅기군 아버지), 이호진(56·2학년 8반 이승현군 아버지)씨가 졌던 나무십자가에 적혀 있던 글이다. 이들 두 아버지와 승현군의 누나 아름씨(25)는 지난 7월 8일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도보순례에 나섰다. 진도 팽목항을 찍고 다시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도보순례는 이호진씨의 제안에 김씨가 화답하면서 ‘갑자기’ 시작됐다.

“특별법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처박은 꼴”
130㎝ 길이에 무게 6㎏의 십자가는 두 아버지가 교대로 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호진씨의 몸에 탈이 나면서 김학일씨의 몫이 되었다. 이후 순례여정 대부분의 길에서 십자가는 김씨의 몫이었다. 이호진씨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순례길에 나서게 되었는데, 2~3일이 흐르면서 발에 물집이 생겨 상당히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화장실에서 양말을 갈아 신는데 짓무른 새끼발톱에서 핏물이 나왔다. 결국 포기해야 했다.

8월 14일. 도보순례를 시작한 지 38일째. 서대전IC 입구에 자리 잡은 진잠다목적체육관에서 대전월드컵경기장까지의 9.3㎞ 구간이다. 오전 6시 정각 길을 나섰다. 200여명의 시민들이 함께했다. 기자도 함께했다. 두 아버지 바로 옆 인도를 따라 걸었다. 간간이 보슬비가 내렸다. 우산을 쓴 사람들,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길게 대열을 이뤘다.

출근길의 자동차들이 무심히 지나친다. 출발할 때 창문을 열고 “힘내세요!”라고 외친 수녀님을 제외하고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다. 창문을 열고 달리던 한 운전자는 행렬을 발견하고 창문을 올려 닫았다. 도보순례단을 마주한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목적지인 대전월드컵경기장이 다가오자 행렬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말 없는 아버지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도착. 두 아버지는 힘껏 포옹했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문정현 신부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는 전북에서부터 도보순례를 함께했다. 아버지들은 차례로 문 신부와도 포옹했다.

세월호 도보순례단에 나섰던 김학일씨(오른쪽)와 이호진씨가 대전 유성성당에서 열린 작은음악회 행사에서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세월호 도보순례단에 나섰던 김학일씨(오른쪽)와 이호진씨가 대전 유성성당에서 열린 작은음악회 행사에서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예수의 고난길을 함께했던 시몬과 베로니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김학일씨였다. “처음 십자가를 지면서 정말 궁금해지더라고요.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에게 여러 번 여쭤봤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해 주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이곳을 걸어오면서 처음 생각난 것은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여기까지 함께해온 여러분들인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웅기, 승현이의 고통을 함께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생각난 것이 베로니카였어요. 예수님의 땀을 닦아주신 베로니카. 아이들의, 승현이, 웅기, 304명의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을 하던 김씨의 목이 메었다.

이호진씨도 소감을 말하다 목이 메어 말을 한동안 잇지 못했다. “1만㎞의 한을 품고 있다가 이제야 900㎞를 내려놓았습니다. 더 걷고 싶은데 이제는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어 더 걷지 못하겠습니다….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중단)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살고 싶어서, 배 속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그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만 믿었던 304명이 한 자리에서 같은 상태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나보다 자식을 먼저 보낸 그 엄청난 한은 제가 평생을 지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분들 책으로 펴낼 것
도보순례 마지막 날이었던 이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안 하겠다”고 김학일씨는 처음에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특히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야권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안산 단원고 분향소에 있을 때 박영선 의원이 원내대표 자격으로 찾아온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너무 화가 납니다. 재·보궐선거에서 4대 11로 대패하니 바로 버리지 않습니까. 버리는 것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가 잠겨 있는 깊은 바닷물 속으로 다시 처박아버린 것 아닙니까.”

월드컵경기장 앞에서 도보순례단 해산식을 마친 뒤, 인근 대전 유성성당에서는 이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행사 자리에서는 특별한 인터뷰 자리도 마련됐다. 두 아버지가 서로를 인터뷰하는 형식이었다. “십자가는 양보하는 것이 아니었다”(이호진), “혼자 십자가를 지게 되니 정말 화가 나고 성질이 났다”(김학일) 같은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이호진씨가 입을 열었다. “순례길에 나서면서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여쭤보고 질문한 말 중 하나가 ‘(순례가) 끝나면 뭐할 거예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안산 가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물어보는 분이 있었는데, 저는 ‘안산에 도착하면 간짜장 곱빼기로 하나 먹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계획은 세월호 2000릿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많은 분들, 그분들의 소중한 인연을 정말로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어요. 그 기록을 정리해서, 소담스럽게 한 권의 책으로 담아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입장하면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입장하면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십자가 도보순례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8월 15일 대전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행사다. 이들은 교황에게 900㎞를 함께한 십자가를 전달하고, 진도 팽목항에서 떠온 바닷물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벗’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줬을까.

방한 첫날, 서울공항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만난 교황은 슬픈 표정으로 “가슴 아프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위로했다. 세월호가족대책위는 8월 15일 오전 ‘세월호 가족들이 교황께 드리는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서 가족들은 “우리 요구는 단순하다. 가족들이 죽어간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왜 위험한 배를 바다에 띄웠는지, 왜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다. 왜 방송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고, 해양경찰들이 제대로 구조도 하지 않는데 대대적인 구조작업 중이라고 거짓 방송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진실을 찾는 길만이 저희들에게 멈춘 시간이 흐르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우리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미사 전에 유가족 일일이 안아준 파파
8월 15일 오전 9시 32분, 교황이 탄 지붕 없는 차가 드디어 대전월드컵경기장에 들어섰다. 교황의 발걸음은 세월호 가족들이 앉아 있는 자리 앞에 멈춰섰다. 교황은 차에서 내려 세월호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여한 세월호 가족은 37명. 두 아버지를 포함한 10명은 미사가 시작되기 전 제의실 앞에서 교황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한 십자가는 유흥식 대전교구장을 통해 미리 제의실 앞으로 전달되어 있었다. 진도 팽목항에서 떠온 바닷물은 주최 측이 행사장 반입금지 물품이라며 곤란을 표시하자 가족들 스스로 반입을 포기했다.

김병권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장이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받은 묵주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이종섭 기자

김병권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장이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받은 묵주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이종섭 기자

면담은 15분 남짓 진행되었다. 교황은 세월호 가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했다. 가족들은 미리 준비했던 메시지를 돌아가면서 낭독했다. 여성 유족 두 명은 낭독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김학일씨와 김형기 세월호가족대책위 부위원장은 메시지를 낭독한 뒤 교황에게 큰절을 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너무 흥분해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못 들었다. 다 끝난 뒤 내가 파파라고 교황을 부르면서 제의실 안에 304명의 영혼과 함께한 십자가가 있다고 말했다. 교황님께 미사에서 억울한 영혼과 함께 집전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황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날 오후 김학일씨가 브리핑에서 밝힌 내용이다.

미사 마지막 삼종기도에서 교황은 세월호 사건을 특별히 언급했다. 메시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특별히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인 대재난으로 인하여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당신의 평화 안에 맞아주시고, 울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며, 형제자매들을 도우려고 기꺼이 나선 이들을 계속 격려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모든 한국 사람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되었으니,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성모님께서 우리 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특별히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 존엄한 인간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자비로이 굽어보시도록 간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가족들이 이날 만남 자리에서 전달한 노란 세월호 추모 배지를 달고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세월호 가족들에게 묵주를 선물했다.

유족들은 “교황의 위로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일까.

전날 도보순례를 마치고 난 다음 유성성당으로 이동하는 길, 기자는 웅기 아버지 김학인씨에게 물었다. 꿈에 아드님이 나온다든지 그런 일은 없냐고. “안 나타나요. 내가 너무 해준 게 없어서인지….” 김씨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직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아니 치유될 수 없다. 세월호 가족으로선 평생을 이고 가야 할 운명이다.

“애들이 너무 불쌍… 끝까지 함께해주세요”
유성성당 작은음악회에서 진행된 ‘세월호 유가족들의 특별한 인터뷰’ 자리에서 김학인씨는 이런 말을 했다. “아까 인터뷰 때 못한 말이 있어요. 아직 우리가 울음을 멈추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이것이 끝날 때까지 울어야 합니다. 저는 계속 울 것입니다. 약속되지 않은 이별,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저는 아직까지 웅기를-그는 눈물을 보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안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안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워서. 노력하겠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도록. 그리고 아들의 이름도 두 번 못 부르겠더라고요. 한 번은 부를 수 있는데. 그래서 내일 미사 끝나면 밤에 한 번 불러보려고요. 웅기를 두 번, 세 번, 백 번 정도 불러보려고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힘드시겠지만, 끝까지 눈물을 흘려주시고 끝까지 울음을 멈춰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4월 16일, 진도 앞바다의 차디찬 바닷속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가해진 고통의 ‘이유’는 규명되지 않았다. 아직, 눈물을 거둬야 할 때가 아닌 까닭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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