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교회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수화·세속화·대형화에 여념이 없는 한국종교들이 과연 변할까.
“바티칸은 멀고 서울대교구는 가깝다.”
8월 18일 4박5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떠난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강조했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려 했던 교황의 방문이 이후 한국 종교에도 영향을 미칠까.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은 바티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상황을 일일이 살필 수는 없을 것이라며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과는 다른 보수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정 추기경은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주교단의 시국선언을 뒤집고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염 추기경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비판하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해 논란을 빚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휴일인 10일 서울 명동성당이 신도들로 붐비고 있다. | 연합뉴스
“주교단 대부분 보수적, 변화 어려워”
한 주필은 염 추기경을 비롯해 주교단 대부분이 보수적 색채를 띠기 때문에 교황이 다녀간 이후에도 한국천주교회에 위로부터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사제나 일반 신자들에게 교황이 미치는 영향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연구실장 또한 보수적인 주교들이 변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 실장 또한 교황의 방문이 “주교들이 압박을 받을 수 있는 요인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교황의 방문으로 과거보다 활동이 뜸했던 가톨릭 평신도 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수도 있고, 비판적 시민들이 가톨릭으로 귀속하면서 아래로부터 변화의 저변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보수화는 언제부터 비롯됐을까. 한상봉 주필에 따르면 1970년대만 해도 천주교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있었다.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전주교구의 김재덕 주교는 대표적인 개혁파였다. 청주교구의 정진석 주교와 대구교구의 이문희 주교는 보수파였다. 김수한 전 추기경은 중도의 입장에 가까웠다. 당시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로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오히려 한국천주교회에는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개혁적인 주교들이 남아 있었다. 김진호 실장은 “가톨릭은 주교의 역할이 크다. 그 지역의 주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쪽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이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70~80년대까지는 개혁적인 주교들이 있어서 사회개혁 문제에 있어 가톨릭이 상당히 활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치관계 혹은 균형관계가 깨진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다. 6월항쟁까지만 해도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의 위원장은 평신도였고, 정평위는 6월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 개혁적인 주교들이 원로가 되어 은퇴하고 그 자리에 보수적인 성향을 띤 주교들이 새로 부임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하게 된다. 주교들은 정평위를 주교들의 자문기구로 격하시키고, 정평위의 위원장 또한 평신도가 아니라 주교가 맡기 시작한다. 그밖에도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 전국 단위의 단체들이 와해되고 교구 단위의 단체로만 남게 되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사회개혁의 문제에 대해 후퇴하게 된다.
내부 분위기의 변화도 있었다. 6월항쟁 이후, 어쨌든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므로 교회 안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일어나면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병원 등의 사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도 사회개혁 문제에서 후퇴하는 계기가 됐다. 한상봉 주필은 “사업주가 한국천주교회인 병원사업장 등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노조를 결성하면서 갈등을 빚게 됐다. 교회에서는 그 이전까지 노동자들을 위해서 교회가 노력했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이 우리 발등을 찍는다는 불만도 나왔다. 노동사목에서 교회가 전면후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역학관계 속에서 한국천주교회는 이후 점점 더 보수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민주화 이후 종교의 보수화는 비단 천주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신교 또한 마찬가지다. 1960~70년대 유신독재와의 싸움에서 개신교는 큰 역할을 했지만 8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점점 보수화됐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기독교는 역설적으로 장로 대통령인 김영삼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부터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면서 진보적인 색채를 띠었던 종로5가(기독교회관)가 힘을 잃었다. 소금이 짠맛을 잃은 셈이 됐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기독교의 세는 훨씬 더 커졌지만, 그 힘이 점점 대형교회로 쏠리면서 복음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개인의 기복신앙에 그치게 했다는 지적이다.
김진호 실장은 개신교의 보수화 및 세속화는 WCC(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개신교에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60~70년대 WCC는 국제외교상 큰 역할을 했던 단체다. WCC가 뒤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개신교는 조금만 활동을 해도 국제적으로 이슈가 됐고, 정당성이 약한 한국 정부로서는 이들의 활동이 큰 부담이자 압박일 수밖에 없었다. 김 실장은 “정부에서 계속 시국사건을 만들어 성직자들을 잡아가도 1년 후에는 풀어줘야 했다. 재정도 당시 다른 사회운동단체들은 늘 빈약했지만 개신교는 WCC나 독일 등에서 오는 펀드가 있어서 비판적 시민사회단체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김영삼 정부가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의 비판적 개신교 세력에 대한 국제단체들의 지원은 끝이 난다. OECD에 가입하면 지원 요건이 삭제되기 때문이다. 이후 WCC의 보호나 후원을 받고 있던 한국의 비판적 기독교 사회운동단체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줄줄이 위기를 맞고 활동이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도 빈자 외면하고 세 불리기만
결은 다소 다르지만 불교 또한 대형화·세속화의 길을 걸으면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정웅기 불교시민사회운영위원장은 “사실 불교는 근대화를 주도한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최근 보면 스스로를 근대화하는 데 매몰돼 있다. 내부에 어떤 체계를 만들고, 규모를 키우고, 그 다음에 돈을 만들고, 그 다음에 조직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보수화·세속화·대형화에 여념이 없는 한국 종교는 교황 방문 이후에 변화의 조짐을 보일 수 있을까. 그러나 교황 방문에 교인 수 감소를 가장 걱정한다는 개신교의 모습은 한국 종교가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기보다는 여전히 ‘세 불리기’에만 급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는 개신교의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아직도 종교의 본래적 역할보다 교인 수 늘리는 데 급급한 게 한심하다”고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49%는 종교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전체 국민의 절반 가까이 종교가 없는 나라는 드물다. 조 교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종교가 세속화·대형화에 급급하다보니 사람들이 교회도 성당도 안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