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방한 첫날, 교황은 할 말을 다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평화와 정의, 가난한 이들과 맺는 연대와 참여가 교황이 청와대에서 행한 발언의 열쇠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모두 교황의 의중을 알아들었을 것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부르짖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롭지만 예수가 전한 복음에 가장 근접한 모습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교황이 14일 한국에 도착한 날 마침 브라질 일간지 <폴랴 데 상파울루>에서는 ‘더러운 전쟁’이라고 부르는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 시절(1976∼1983년)에 납치된 외손자를 36년 만에 찾은 한 인권운동가에게 교황이 축하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시절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었던 교황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후회하는 고백을 하곤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가 되고 나서는 수차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교회의 비겁함에 용서를 청했다. 그 뒤로 교황은 콘스티투시온 광장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길거리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폐해에 저항했다. 그의 솔직한 죄책 고백과 잇따른 사회적 투신을 눈여겨보면서, 또 다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보는 듯하다. 실상 교황으로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시성 절차를 다시 진행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그 교황이 박정희의 유신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광주 학살을 경험한 우리나라에 찾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린 교황이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지만, 마음으로 화답한 것은 환영장에 와 있던 세월호 유족들이었다. 교황은 고 남윤철 안산 단원고 교사의 아버지 남수현씨와 부인 송경옥씨를 소개받자 왼손을 가슴에 얹고 슬픈 표정으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위로했다. 교황은 국가권력의 최고 정상보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가련한 이들을 들어 올리시는 분”이다. 이는 4박5일간의 교황 방한 일정이 어떻게 짜여져 있든지 교황은 시간과 장소를 가림 없이 평소에 생각하신 바를 전하고, 원하는 일을 주저 없이 행하실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방한 유치 자랑하던 정부에 ‘세월호 지뢰밭’
박근혜 정부는 줄곧 이번 교황 방한 유치가 정부와 대통령의 공이라고 우겼지만,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서는 이번 교황 방한이 순수한 ‘사목적 방문’이라고 못 박았다. 교황 방한 일정을 조율할 때는 정권의 심기가 불편할 만한 내용을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행과정에서 세월호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는 곳곳이 지뢰밭이 되었다. 15일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는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 이들이 준비한 십자가를 교황이 받았고, 16일 광화문에서 봉헌된 시복식 미사에서는 세월호 유족들 600여명이 고스란히 미사에 참석해 교황을 만났다. 결국 이번 교황 방문의 가장 뚜렷한 상징은 ‘세월호 참사’다. 교황은 누차에 걸쳐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지 여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 사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는 ‘야전병원’이라고 말한 교황은 이제 광화문 한복판에 ‘야전병원’을 짓고 그 천막 아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할 것이다. 여기서 정부·여당의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교황은 이미 방한 첫날에 당신이 하고 싶은 핵심적인 말은 다 해놓았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다 교황의 의중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교황이 말하는 평화는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또한 그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다. 교황은 청와대 연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을 앞자리에 앉혀 놓고, “정치지도자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목표는 교황이 문제 삼은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대립항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할 것”을 요청한 것은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적용된다.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밀양 송전탑 문제,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가 여기에 겹쳐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며 무관심의 세계화가 아닌 “연대의 세계화”를 호소했는데, 여기에는 바로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사건으로 드러난 독재정권의 적폐가 드러난다. 그래서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이 나라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계속 열망하고 있다”고 보증했다.

평화와 정의, 가난한 이들과 맺는 연대와 참여가 교황이 청와대에서 행한 교황 발언의 열쇠말이다. 이 같은 내용을 교황은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만난 한국천주교회의 주교들 앞에서 반복한다.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을 집전하러 온 교황은 주교들에게는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이상”을 요구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하며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교회는 더욱 변두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단순한 자선사업에 머물라는 것이 아니다.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이루라는 예언적 요청이다. 이를 위해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한 바에 따라 바꿀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예언적 요청
교황은 결코 의례적으로 말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니다. “정통교리의 옹호자들은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체제와 관련해 공모자라는 비난을 받는다”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다. 여기에 관료주의까지 겹치면 구제불능이다. 복음적 영감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은 복음적 신실성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가난한 교회’를 요구해 왔다. 교황 스스로 말이나 강론에서 추상적으로 뇌까리는 ‘가난’이 아니라 몸소 가난을 사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번 방한 때처럼 사목방문을 할 때마다 검정색 가방을 챙기는 교황의 모습을 우리는 직접 보았다. 그처럼 주교와 사제들에게, 수도자들에게, 심지어 평신도들에게도 자기 몫의 영혼을 챙겨 다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예수의 제자로서 잘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챙겨서 생각하는 이들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한다. 그 과정에서 기뻐할 만한 자는 당연히 ‘가장 가난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가 맨몸으로 로마와 식민지 지배세력과 맞서 싸웠듯이, 교회도 가난한 그대로 가난한 이들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교회 밖으로 걸어 나가자는 게 교황의 생각이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