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굽이 죽령 옛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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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옛길은 소백산역 또는 죽령 고갯마루를 출발점으로 잡는다. 수철리 마을 입구부터 죽령 옛길의 이정표가 친절하게 이어진다.

초여름 신록이 물드는 산하는 생명으로 넘친다. 오래된 옛길을 따라 숲으로 들면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깨우는 느낌이다. 신라 사람 ‘죽죽’이 처음 길을 열었다는 죽령 옛길. 18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푸른 초록으로 물든 죽령고개를 다시 오른다. 길은 생명처럼 다시 이어진다.

태초에 길은 없었다. 누군가 처음 길을 열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삶과 역사도 이어졌으리라. 대체적으로 그 길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죽령 옛길은 처음 길을 연 사람의 이름과 시기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제 다시 한동안 잊혀졌던 그 길을 걷는다.

죽령 옛길로 드는 들머리.

죽령 옛길로 드는 들머리.

‘망령(妄靈)나기보다 들고나기 힘든 거이 죽령 아닌게베.’ 타박타박 사람 발자국이 나고, 우마차가 돌돌돌 길을 내고, 자동차가 줄줄이 다니면서도 죽령은 언제나 굽이굽이 구르리 구르리 서러운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갯길이었다. 죽령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경계의 옛 고갯마루를 일컫는다. 해발 689m로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으로 대재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그 근방의 터박이들은 ‘죽을 똥을 싸야 오를 수 있는 고개’라 해서 ‘주글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옛 고갯마루 주막터에 인심도 그대로
소백산의 허리쯤인 이 고갯마루는 신라 아사달왕 때에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처음 길을 열어 죽령이라 불려 왔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죽령길을 개척하다 죽은 ‘죽죽’의 제사 지내는 사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심술 많은 이 산자락 터는 삼국시대까지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하며 삼국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뒤엉키는 격전을 벌이던 터이기도 했다.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백제와 연합해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후 고구려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온달 장군이 자청해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소백산산자락 아래의 수철리 마을 풍경.

소백산산자락 아래의 수철리 마을 풍경.

이곳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번잡했다. 예부터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영남 3대 관문으로, 조선시대부터 1910년대까지 경상도 동북지방 사람들이 서울을 왕래하기 위해 이 고갯길을 올랐다.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선비, 봇짐과 행상을 진 보부상, 부임한 지역을 오가는 관리 등 모든 사람들이 죽령을 통해 오갔다. 고개를 넘으려면 소백산맥의 바람 그늘에 둘러싸이고 아흔아홉 굽이에 구름도 한숨을 돌려야만 넘어야 했다던 이 굽이길을 걷기 위해 짚신 두세 켤레를 허리춤에 차야 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상도 땅의 고집 센 양반네도 한양에 오르려면 모두 이 죽령굽이를 올라야만 했다.

죽령고개에서 11년째 죽령주막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이 선선히 등산객들을 맞이한다.

“지체 높은 양반네도, 천하디 천한 백성들도 구슬구슬 땀을 서 말은 흘려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귀천 없는 길이라고들 혔제. 새로 길이 나기까지만 해도 겨울에 눈이 내리면 차가 못 올라오는 곳이였어라.”

하지만 이 길은 새길이 나면서 한동안 지나는 객의 발걸음이 줄어들고 덩굴에 묻혀버린 한갓진 굽이였다.

“죽령터널이 개통된 뒤 길손이 줄어들었다가, 저 아래서부터 새로 옛길이 복원되면서 요사이 등산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저 아래 소백산역에서부터 많이들 옛길로 올라오시지라.” 옛 희방사역인 소백산역에서 오르는 죽령 옛길이 다시 복원되어 이 길을 걷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옛길을 오르다.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옛길을 오르다.

죽령 옛길은 소백산역 또는 죽령 고갯마루를 출발점으로 잡는다. 수철리 마을 입구부터 죽령 옛길의 이정표가 친절하게 이어진다. 소백산 자락 아랫마을인 수철리 마을은 산자락 언덕에 사과원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는 곳이다. 마을길을 따라 소백산역 방향으로 10여분쯤 걸으니 죽령 옛길이 시작된다. 길은 소백산 자락길 중 한 코스로 소백산역부터 느티쟁이주막, 주점터를 거쳐 죽령주막까지 2.8㎞가량 이어진다. 중앙선 철길과 나란히 누운 길을 따라 걸으면 죽령 옛길 표지판이 보인다. 사과원을 지나면 덩굴숲이 이어지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쉬엄쉬엄 오르면 죽령주막까지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소백산 장승부부 앞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뒤 다래덩굴과 으름덩굴이 터널을 이룬 숲길로 오른다.

사람이 길을 열고 길을 따라 역사는 이어진다
낙엽송과 인공림, 참나무 등이 빼곡히 들어선 천연숲은 여름 햇살을 받아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참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낙엽송이 장쾌하고 시원스럽다. 길을 걷다보니 고개참 길목마다 돌무지가 쌓여 있다. 돌을 쌓아 올린 집터의 흔적으로 예전 호시절에 주막이 있던 자리다. 예전에는 고갯길 곳곳에 주막들이 들어서 쉼터 역할을 하며 주막거리를 형성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소백산역 자리에 있던 무쇠다리 주막거리였고. 그밖에 느티정, 주점 주막거리, 고갯마루 주막 등 네 곳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천연숲.

천연숲.

죽령주막은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다.

죽령주막은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다.

죽령 옛길의 출발지인 소백산역.

죽령 옛길의 출발지인 소백산역.

다시 길을 따르니 곳곳에 죽령에 얽힌 옛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죽지랑, 바보 온달, 퇴계와 온계 형제, 이현보와 주세붕의 이야기들이 표지판에 적혀 있는데, 마치 옛길에서 그들을 만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36개 젖꼭지 중 한 개를 떼어내고서야 움직였다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 이야기는 재미나다.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문수보살 현신을 상원사 계곡에서 만나 증세가 완화되자 상원사를 원당 사찰로 삼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종을 찾아 상원사로 옮기라고 명을 내린다. 수소문해서 찾은 종은 경북 안동 남루의 동종. 그러나 죽령 고개를 앞두고 종을 실은 수레가 멈춰섰다. 장정들이 달려들어 움직이려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고향을 그리워했을 동종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종의 유두 하나를 떼어내 안동으로 보냈다. 그제야 동종을 실은 수레가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가파른 언덕 끝에 떡 버티고 선 죽령루가 보인다. 누각은 고갯마루에 자리해 죽령을 상징한다. 전면에는 ‘죽령루’, 후면에는 영남의 첫 관문이므로 옛 지명인 교남이란 지명에 근거해 ‘교남제일관’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누각에 오르니 소백산 줄기와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등이 펼쳐진다. 지친 등산객이 전망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는 쉼터로서 더 없이 좋은 장소이다. 죽령고개의 마지막 주막인 죽령주막에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이 옛길을 돌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고갯마루 정상에는 ‘여기서부터는 영주입니다’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서 있다. 긴 역사의 여운이 흐르는 듯하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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