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M대로 안 할 때 사고는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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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대부분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발생한다.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수색과정에서 발생한 잠수사의 사망사고도 유도리를 앞세운 탓이 크다.

지난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이후 ‘매뉴얼’이 화두가 됐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기본적인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 일어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는 지난 5월 7일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규명 과제를 내놓았다. 대부분이 매뉴얼의 준수 여부와 관련돼 있다. 대표적인 것들이 ①잘못된 세월호의 화물 결박 ②연안해상교통안전센터(VTS)의 부실한 관제 ③사고 발생 직후 퇴선명령을 내리지 않은 세월호 승무원들의 잘못된 대응 ④사고 발생 직후 해경의 잘못된 초기 대응 ⑤정부의 엉터리 재난관리 대응 ⑥‘인명구조’ 명령권을 한 번도 발동하지 않은 해경의 직무유기 의혹 ⑦구조과정에서의 무리한 잠수사 투입 등이다. 한마디로 이번 사고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진 데는 생사의 기로에서 승객들을 내팽개친 선장 등 선원들의 범죄행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4월 26일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사고 해역 수색에 투입된 해난구조대 잠수사가 바지선으로 올라서 장비를 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지난 4월 26일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사고 해역 수색에 투입된 해난구조대 잠수사가 바지선으로 올라서 장비를 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군의 대표적 매뉴얼인 야전교범
언론도 비판의 대상이다. 정부 발표를 검증 없이 보도하고 현장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으며, 구조자 및 실종자 가족들의 인권침해성 보도를 하는 등 취재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론이 수색·구조 상황을 전하는 과정에서 잠수사의 ‘대기’라는 말 대신 ‘투입’이라는 단어를 써서 500명 이상의 잠수부들이 마치 실제로 물속에서 수색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한 것도 문제가 됐다.

그렇다면 ‘매뉴얼’이란 무엇이가. ‘매뉴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제품의 사용 설명서다. 둘째는 교범 또는 교본이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이 접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아 놓은 책자라고 할 수 있다.

군의 대표적 매뉴얼이 바로 FM(Field Manual), 즉 야전교범이다. ‘에프엠(FM)대로 하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 FM은 군인들이 처할 수 있는 각종 상황에서 해야 할 행동들을 체계화해 놓았다.

심지어 신체 각 부분의 동작과 초 단위 시간계획까지 들어 있는 FM도 있다. 미 육군이 갖고 있는 야전교범만도 500종이 넘는다.

최근 뉴스에서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지형숙지 훈련에 나선 미군 헬기들 때문에 축사 지붕이 날아가거나 비닐하우스 등이 망가졌다는 민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다.

이는 미군 헬기 조종사들이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매뉴얼대로 비행한 때문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비행 중 농가가 나온다 해도 고도를 높이지 않고 저고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매뉴얼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은 비행경로를 조정해 헬기의 민가쪽 비행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매뉴얼에 따른 저고도 훈련은 지금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했던 한 미군부대가 포천의 사격장에서 야간 사격훈련을 하다가 인근 야산에 불을 낸 적이 있다. 신고를 받고 소방차까지 달려왔지만 미군들은 사격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매뉴얼에 따라 정해진 사격훈련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미군은 훈련 실시에 따른 민간의 피해는 전담부서가 해결하면 되는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훈련과 피해보상은 별개라는 식이다.

주한미군 다연장 로켓 발사시스템 사격훈련. | 경향신문 자료

주한미군 다연장 로켓 발사시스템 사격훈련. | 경향신문 자료

한국군 지휘관은 훈련에 따른 민간인 피해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가령 국도에서 전차 기동훈련을 하다가 전차의 길다란 포신이 구멍가게 간판 하나라도 건드려 부수게 되면 보상과정 등 후속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휘관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구멍가게 주인에게 주고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FM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일본말에서 온 ‘유도리’라는 표현이 있다. 원래 일본어 뜻은 공간적·시간적으로 조그마한 여유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지휘관이 개인 돈으로 구멍가게 주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일종의 ‘유도리’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의 대부분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매뉴얼을 따르지 않아 발생한다.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수색과정에서 발생한 잠수사의 사망사고도 유도리를 앞세운 탓이 크다. 선체 수색작업 현장에서는 안전불감증이 만연했다. 민간 잠수사들은 안전교육도 받지 않은 채 선체 수색 경로 등에 대한 브리핑만 듣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해군 잠수요원들 군인정신으로 버텨
그러다 보니 한 잠수사가 출수하는 과정에서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과 공기공급 호스가 꼬여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뻔한 사건도 있었다. 바지선 위에서 내려준 공기공급 호스의 길이는 100m 정도인데 잠수와 출수 과정에서 이 호스가 조류를 타고 옆에서 작업 중인 다른 잠수사의 호스와 꼬일 수 있다. 이 경우 잠수사들 스스로 풀지 못하면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지만 구조팀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며 근본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이건 유도리가 아니라 안전불감증이다.

심해잠수의 매뉴얼도 있으나 마나다. 잠수 안전 규정은 ‘10분 이상 잠수 후 15시간 50분 이상 휴식’이다. 수심 30m에서 10분간 잠수하는 것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만큼이나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군 해난구조대(SSU) 잠수사와 해군 특수전전단 수중폭파대(UDT) 소속 잠수사들 일부는 하루에 두 번이나 잠수작업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SSU 김진황 대령은 “현장에 배치된 SSU 대원 120명 가운데 실제로 물속에 투입되는 인원은 65명 안팎”이라며 “실전 경험 3년 이상이 돼야 맹골수도 같은 조류가 센 곳에서 작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원하거나 교대해 줄 수 있는 민간 잠수사 인력도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해군 요원들의 잠수 횟수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잠수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잠수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월호 침몰 이후 마비보다 심한 수준의 잠수병 증상을 호소한 잠수사만 지난 5월 8일까지 16명에 달하고 있다. 한 대원은 하반신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고(故) 한주호 준위도 3일 연속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잠수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해군 잠수요원들은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매뉴얼도 무시해 가면서 군인정신으로 버티고 있다. 이들이 살인적 잠수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시신이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가족 품에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다. 지원나온 미군은 천안함 침몰사고 수습현장에서도 그랬듯이 이런 목숨을 건 한국 해군 잠수요원들의 작업 행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돈벌이를 위해 매뉴얼을 무시해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에서 해군 잠수요원이 사명감 때문에 매뉴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이는 ‘FM대로’는 아니다.

<박성진 경향신문 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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