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번뇌 씻어내는 19암자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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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가 신성의 존재로 양산을 빛나게 한다면, 영축산 산내에 뻗어 있는 19개의 암자순례길은 수행자의 영역으로 그 빛을 더한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는 까닭을 이제사 짐작할까? 삼보일배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에 스며드는 때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선명하게 마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 걸음마다 엎드림으로 이기심과 탐욕,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떨쳐낼 수 있을까? 산문으로 드는 길, 늙은 노송의 굽어진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드리워진다.

영축산 통도사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성지이다.

영축산 통도사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성지이다.

삼보일배의 마음으로 엎드려
산문으로 들어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길을 따라 오른다. 이 땅의 어디든 성스러운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성지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곳이 산이건 바다건, 그 어디에서건 속죄하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 땅에 엎드려 통곡으로 속죄하고 싶었다. 갈피를 잃어버린 삶의 끝자락에서 산문으로 들어 길을 찾는 셈이다. 본래 삼보일배(三步一拜)는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여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구하기를 기도하는 불자의 수행법이다. 무릇 마음과 행동이 합일을 이루어 일치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정갈히 씻어내는 의식으로 산길을 오른다. 그 첫걸음은 그리움으로, 두 번째 걸음은 용서로, 다시 한 걸음은 부끄러움으로 걸을 셈이다.

언젠가 길에서 만난 노승은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고, 어느 작은 암자의 물 맑은 돌샘물로 정신이 퍼뜩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통도사 산문 무풍교에서 일주문에 드는 길은 우거진 노송이 굽어진 길이다.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로 불리는 이 길은 굵은 둥치의 안강송이 도열한 술길로 약 1.5㎞의 길을 따라 사시사철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길이다. 번뇌 깊은 속인들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삶의 갈피를 잃어버린 어른들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순례자의 마음으로 엎드려 길을 따른다.

양산 통도사는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이다.

양산 통도사는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이다.

계곡을 따라 겹겹이 우거진 소나무숲을 지나자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이 나서고, 다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산모퉁이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고, 직진을 하면 주차장과 산내암자로 오르는 길이다. 번뇌의 깊이가 길을 갈라놓은 셈이다. 일주문 지나 색색의 연등길을 지나자 천왕문이 나선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통도사 경내이다.

영산인 취서산의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합천의 해인사,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통도사는 3개의 가람이 합해진 큰 사찰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상로전(上爐殿)과 통도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중로전(中爐殿), 그리고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下爐殿)으로 구분된다. 가람 형태는 창건 당시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으며, 산지도 아니요 평지도 아닌 구릉지에 탑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솟아 있는 품새다.

천년 고찰 통도사는 적멸보궁
상노전의 중심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설법전은 그 자태가 웅장하고, 좌우로 명부전과 응진전의 어울림이 편안하다. 통도사의 상징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통도사는 이 땅의 5대 적멸보궁 중에 한 곳으로 신성의 성지이자 영적인 공간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이란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상태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일컫는다.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지금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여정으로 충분한 길이다. 세상 번뇌와 집착이 모두 사라진 적멸(寂滅)의 상태, 욕심과 번뇌가 사라진 세상을 소망한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얻어지는 적멸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풀이한다. 많은 순례객들이 산문을 찾아드는 이유이다. 적멸보궁을 찾아 걷는 19암자의 순례는 지금껏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는 뉘우침의 여정이 될 것이다.

통도사가 신성의 존재로 양산을 빛나게 한다면, 영축산 산내에 뻗어 있는 19개의 암자 순례길은 수행자의 영역으로 그 빛을 더한다. 암자는 통도사를 중심으로 산중 곳곳에 자리하는데, 암자를 찾아 오르는 길 자체로 순행의 의례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천년고찰 통도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천년고찰 통도사.

통도사 19암자 순례길을 따라
19암자 순례길은 모두 두 가지 코스로 오를 수 있다. 먼저 무풍한송길을 지나 통도사를 돌아 보타암, 취운암, 수도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까지의 길과 무풍한송길, 통도사, 안양암, 자장암, 서축암, 반야암, 극락암, 비로암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두 길은 각각 5.5㎞, 6.5㎞로 천천히 걸어서 오르면 2시간 30분, 4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이 두 코스를 합친 것을 ‘19암자 순례길’이라 일컬으며 총 22㎞에 이른다.

큰 절을 나와서 산내의 암자로 향한다. 비교적 잘 이어진 산길을 따라 깊은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깊은 내면의 자아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또 산중의 암자는 저마다 개성 있는 불교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순례객들의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그 중 사명암은 화려하나 번듯하지 않은 단청이 아름답고, 백련암과 옥련암은 주변 풍경과 어울림의 정취가 그윽하다. 옥련암에서 돌우물에 목을 축이고, 순례객들이 꼭 오르는 암자가 서운암이다. 서운암은 주변 야산의 야생화 덕택으로 ‘꽃암자’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암자이다. 봄부터 매화와 유채, 조팝나무, 금낭화 꽃들이 피어나는 까닭이다. 서운암 장경각엔 16만 도자대장경이 봉안돼 있다. 1991년부터 10년 동안의 불사로 완성된 ‘도자기판 고려대장경’이다. 무게 4㎏짜리 도자 16만3000여장을 지극한 정성으로 빚어낸 수행의 결과이다. 서운암 장독대는 통도사의 또 다른 풍경이다. 절집 마당에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선 2000여개의 장독대가 넉넉한 절집의 풍경을 그려낸다.

일주문을 지나면 색색의 연등이 이어진다.

일주문을 지나면 색색의 연등이 이어진다.

수도암을 지나 작은 암자 안양암에 오르니 통도사 전경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그다지 높지 않은 영축산 능선이 절집 지붕 위로 출렁이며 흐르는 듯하다. 비로소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심사가 절로 풀어지는 느낌이다. 적멸보궁을 돌아보고 암자를 둘러보는 동안 몸과 마음이 평온해진 듯하다.

다시 산을 내려와 산문을 나설 즈음 소나무숲길에서 순례객 한 쌍이 돌탑을 쌓고 있다. 적멸보궁을 순례하는 이유를 묻자 “업장 소멸을 위해서지요. 평생 적멸보궁 순례를 세 번 하면 업장 소멸이 이루어집니다”라고 답한다. ‘업장’은 자신이 지은 업으로 인해 나타나는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말한다. 하여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순례하면 이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 말이다.

19암자길을 걷는 순례객들.

19암자길을 걷는 순례객들.

법구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욕심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몸뚱이보다 더한 짐이 없고, 고요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우거진 울창한 소나무숲길이 그제사 바람 한 자락 없이 고요하고 청량하다. 탁했던 마음 맑아지는 듯하여 가볍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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