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대구로의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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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길’은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에서 벌인 동수전투의 설화에 근거해 길을 따라 조성된 역사문화생태길이다. 모두 8개의 테마로 이어진 코스는 총 35km의 길로 울창한 숲과 농로로 이어져 있다.

팔공산은 대구를 대표하는 산이다. 팔공산에는 그만큼 많은 이야기와 역사문화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팔공산에 새로이 역사문화생태길로 조성된 왕건 길을 따라 불로동 고분군을 둘러보고, 옛 전통마을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옻골마을에서 옛 선현들의 삶을 통해 제대로 살아갈 지혜를 물을 셈이다.

팔공산 자락에 숨겨진 이야기길
높이 1198m의 팔공산을 중심으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는 이른바 팔공산맥이라 불린다. 이 산맥의 형세가 빙 둘러 대구의 분지 형태를 이룬다. 팔공산은 제1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봉(東峰)과 서봉(西峰)이 날개를 펼쳐 비상하는 형국이다. 이 팔공산은 대구 사람들이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믿음직한 산으로, 1980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이라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중악(中岳)에 비겨 중사(中祠)라 하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삼국 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수행을 하며 이곳 팔공산에서 통일을 구상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신라 말 견훤이 서라벌을 공격하자 고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가, 공산 동수에서 포위를 당하여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본래 ‘공산’이었던 산 이름에 신숭겸을 포함한 여덟 명의 고려 개국공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팔(八)자를 붙여 팔공산(八公山)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돌담길로 이어진 옻골마을은 옛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돌담길로 이어진 옻골마을은 옛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구 사람들은 예부터 팔공산의 정한 기운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팔공산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도 효험이 높기로 알려진 일명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다. 갓바위는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좌불상으로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기도의 자리로 유명하다. 신라 선덕왕 때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머리에 쓴 갓의 모양이 대학 학사모와 같다 하여 입시철이면 합격 기원의 행렬이 북새통을 이룬다. 팔공산 작명의 여러 유래 중, 원효가 중국 승려 8명을 득도케 했다는 설, 3명의 성인과 5명의 깨우친 나가 나왔다는 설이 있는데, 그만큼 기도의 효험과 산의 정기가 좋은 터였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왕건 길 따라 불로동 고분군까지
팔공산을 바라보고 동구 지묘동 신숭겸 유적지를 기점으로 하여 옛 이야기길로 꾸며진 ‘왕건 길’을 따라 걷는다. ‘왕건 길’은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에서 벌인 동수전투의 설화에 근거해 길을 따라 조성된 역사문화생태길이다. 모두 8개의 테마로 이어진 코스는 총 35㎞의 길로 울창한 숲과 농로로 이어져 있다. ‘용호상박길’이라 불리는 제1길을 따라 왕건전망대까지는 총 4.3㎞, 서붓서붓 걷는다 치면 대략 1시간3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신숭겸 유적지를 둘러보고 탐방로가 시작되는 탐방센터, 대곡지, 원모재를 지나 전망대로 오르는 코스이다. 왕산을 옆에 두고 대곡지로 길을 잡으니 숲길과 마을길이 이어진다. 

옛길을 따르니 걸음걸음으로 하얀 벚꽃이 바람으로 꽃비 되어 흐른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봄꽃들의 죽음은 바람에 풍장되어진다’고 했다. 벚꽃이 제대로 지는 것은 바람을 온전히 만났을 때다. 바람을 기다렸다가 한 잎새 한 잎새로 떨어지며 마치 눈송이처럼 벚꽃잎은 하늘에서 내리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승천의 의식과 가깝다고 서술한다. 바람에 풍장(風葬)되어지는 벚꽃들의 의식이 찬란하다. 가파른 산길에 올라서니 전망대다. 바로 앞으로 팔공산과 환성산, 초례봉 등 팔공산 연봉 봉우리가 한눈에 조망되며 바람 한 자락에 가슴이 탁 트인다. 잠시 숨을 돌리고 대구자연염색박물관 쪽으로 길을 내려선다. 마을 농로를 따라 피어난 복사꽃이 옛 충신의 넋처럼 붉고도 선연하다.

복사꽃이 흐트러진 마을을 돌아나와 다시 불로동 고분군으로 길을 잡는다. 불로동은 견훤에 패하여 쫓기던 왕건이 거친 숨을 돌리며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어른들은 피난을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분군은 모두 211기의 고분이 복원되어 있는 무덤의 무리다. 지름 15~20m, 높이 4~7m 정도의 크고 작은 봉분들이 낮은 구릉지에 넓게 펼쳐져 있다. 봉분들은 대개 5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 무덤으로 추측한다. 정상에 오르면 옛 무덤의 지평 위에 멀리 대구의 현대 도심이 하나로 풍경을 이룬다. 1500여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연록으로 물든 고분들의 모습에서 생성과 소멸의 시간이 새롭게 각인된다.

견훤과 왕건의 전투가 벌어진 설화를 따라 역사문화생태탐방길로 꾸며진 왕건 길.

견훤과 왕건의 전투가 벌어진 설화를 따라 역사문화생태탐방길로 꾸며진 왕건 길.

고즈넉한 돌담길 돌아 옻골마을
봉무공원까지 둘러보고 옻골마을로 발걸음을 돌린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산 아래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다. 동구 둔산동에 위치한 이 마을은 대구 시내에서 차로 15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 경주 최씨 광정공파(匡正公派)의 집성촌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인 최동집(崔東集) 선생이 마을에 정착(1616년·광해군 8)하면서 400년 세거지를 이룬다. 마을 들머리로 접어드니, 수령 350년의 거대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수호하듯 위풍당당하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었다는 이 회화나무는 ‘최동집 나무’라 불린다. 마을 어귀에 임귀희 한국인성예절교육원장(64·대구광역시 중구 명륜26길)이 길마중을 나와 있다.

“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사당(報本堂祠堂)을 비롯해 20여채의 조선시대 가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부 가옥은 현대식으로 개량되었고, 또 세월의 더께로 퇴색하였지만, 오랜 종가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이어온 까닭에 마을의 살림살이며 생활상에서도 옛 모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습니다.”

옻골은 마을 남쪽을 뺀 나머지 3면의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인데, 팔공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 금호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다. 뒷산 북쪽의 봉우리는 마치 살아 있는 거북처럼 생겼다 하여 생구암(生龜岩)이라 부른다. 안내를 받아 길을 따라가니 골목골목 기와를 이고 선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 북쪽에 400여년 전 처음 터를 잡은 종가인 ‘백불고택’(百弗古宅)이 자리한다.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사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고택의 오른쪽으로는 보본당이 있다. 다시 토담을 따르니 정려각이 보인다. 백불암 최흥원의 효심을 기려 1789년에 세워진 건물로 정려각 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다. 임 원장은 옻골마을에 전통체험교실을 열며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근본으로 ‘한국의 문화와 전통예절’을 널리 알리고 있는 예절전도사이다.

왕건 길에 봄꽃이 한창이다.

왕건 길에 봄꽃이 한창이다.

“수백년 동안 지켜온 우리 문화의 뿌리는 예절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마음의 근본을 찾아가는 예절은 지켜져야 합니다. 5000년 동안의 조상들의 삶이 우리 문화의 뿌리이며, 그 바탕이 바로 예절교육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때문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문화 배우기를 통해 인성 함양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옛 전통마을을 찾아본다면, 이 봄에 아주 뜻깊은 여행이 될 것입니다. 조상들의 삶은 다음 세대에게 교훈이 되니까요.”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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