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남녘, 매화향 그윽한 순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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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쪽부터 북상을 시작하는 꽃들은 3월 중순을 전후하여 꽃잔치를 시작한다. 순천 월등면 개월리를 찾으니 온 마을에 매화꽃향이 그윽하다.

스멀스멀 봄의 기운이 대지와 들판으로 차오른다. 한반도 남쪽 꽃들은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릴레이로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동백,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벚꽃, 개나리, 진달래까지 봄꽃들이 색색의 무리로 피어 남쪽에서 북상을 시작한다. 그 꽃무리가 동서로 색띠를 이루고 다시 물결처럼 파동 치는 향기로 상춘객들을 불러 모은다. 남녘땅 순천. 봄 꽃피는 옛 고향마을만 같은 순천의 동리마다 꽃들이 한창이다.

단비 내리는 봄날, 순천행 우중기행
시골 장바닥 늙은 어미의 빈 소쿠리에 씀바귀며 냉이 향이 가득 담기면 비로소 봄이다. 여수 동백섬이 홍백으로 물들고, 섬진강 매화가 팝콘처럼 톡톡 터지면 꽃들의 경주가 시작된다. 한반도 남쪽부터 북상을 시작하는 꽃들은 3월 중순을 전후하여 4월과 5월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아이들 봄철 운동회만 같은 꽃잔치를 펼친다. 봄꽃들은 물결처럼 피고 꽃향기는 바람이 되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초가와 기와집 담장도 넘어 구중궁궐까지 큰 파동으로 피고 지며 인간사에 아름다운 향으로 퍼져나간다.

봅이 오는 남녘땅, 순천의 마을 풍경.

봅이 오는 남녘땅, 순천의 마을 풍경.

꽃을 쫓아 남도 아랫녘 순천으로 남향한다. 중부 충청의 경계쯤을 벗어나 전라도로 접어들자 가랑가랑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천 들머리로 들 때까지 그칠 기색은 전혀 없고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봄비는 예부터 다디달아 ‘단비’라고도 하고 ‘꽃비’라고도 했다. 농사일을 천하 제일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也)으로 삼을 때부터 한해 농사의 채비로 때맞춰 내리는 봄비는 말 그대로 단비다. 그래 평생 농사짓고 사는 흙투성이 농부 어르신들은 여전히 봄비를 내린다고 하지 않고 ‘봄비가 오신다, 비님 오시네’하며 손님맞이하는 마음채비로 봄비를 소원했다.

그만큼 봄에 내리는 한 자락 빗줄기는 꾸부정한 농부의 삶에 소중한 단맛을 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꽃을 샘하는 바람이 돌아나가면 촉촉히 대지를 적시어 꽃숨을 틔우는 것이니, 이 봄비를 꽃비라 아니할 방도도 없었다. 봄꽃을 기다려 반가워하는 이유가 모든 햇것이 그러하듯 겨울을 버티고 다시 솟구치고 태동하는 생명의 경외 때문일 것이다.

봄의 향기 그윽한 순천 향매실 마을
매화꽃이 군락을 이루어 핀다는 순천 월등면 개월리를 찾아 나선다. 마을로 접어드니 온 마을에 매화꽃 향이 그윽하다. 이 마을은 향매실마을이라고 따로 불릴 만큼 향이 좋은 매실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순천에 매실이 재배된 기록은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살필 수 있는데, 순천지역의 토산물로 조선 초부터 매실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구례군과 경계를 이루어 비옥한 평야를 지니고 있다. 또 내륙산간의 온난한 기후 덕택으로 매실 재배의 최적지로 손꼽히는 고장 중 한 곳이다. 때문에 마을 어른들은 광양 청매실과 견주어 순천 향매실은 향이 깊고 맛도 으뜸이라고 자찬한다.

“순천에 매화나무가 본격적으로 심어진 때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많이 심으면서부터입니다. 그 이후 1960년대 중반에 와서 마을에 매화 재배지가 형성되고, 90년대에 이르러 일본 개량종 위주로 재배되었어요. 그래서 재배되는 매실은 대부분 그때 심어진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이었는데, 한 10년 전쯤에 우리 토종 매화나무가 개발되었지요.”

우리나라 고유의 순천산 토종 품종인 ‘천매’(순천농업기술센터)가 개발된 때가 2000년의 일이다. 또 이를 이어 2008년 ‘순천 선암사’의 이름을 딴 ‘선암매’ 역시 새로운 토종 품종으로 이름을 얻게 된다. 현재 순천의 매실 재배농가는 황전면과 월등면 등을 중심으로 약 2000호를 이루고 그 중 천매를 심는 농가는 열 집 중 세 집이다.

꽃이 피고 지는 봄의 순간 호들갑스럽게 맞이하는 것이 봄의 꽃이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콧노래를 부르는 아이, 다홍빛 춘정에 물든 발그레한 처녀의 사붓한 걸음, 헛바지 펄럭이며 벚꽃 아래를 재게 걷는 할아버지, 이 모두가 봄을 맞이하는 설렘의 풍경이다. 향매실을 돌아나와 지난해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열었던 순천만 인근을 기웃하고, 순천의 고향마을 순천낙안읍성까지로 길을 잡는다.

순천낙안읍성은 옛 풍경이 원형적으로 남아있다.

순천낙안읍성은 옛 풍경이 원형적으로 남아있다.

고향마을 순천낙안읍성의 봄
올해에도 순천시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과 순천만정원을 하나로 묶어 ‘순천만정원’이란 이름으로 봄잔치를 준비해 4월 20일 개장을 앞두고 있다. 작년에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었던 모노레일 순천만 PRT를 타고 순천만 습지를 둘러본다. 6인승 무인궤도차에 함께 오른 승객들 중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온 지 7년이 되었다는 장문희씨(28·인천시 부평동 장재로)의 모습이 생기발랄하다.

“한국에 온 지 7년째입니다. 현재 대학 졸업반인데, 관광경영이 전공이어서 한국 여행을 자주 다니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견문을 넓히고 있어요. 작년에는 한국 여행을 참 많이 했어요. 여행을 통해서 얻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인연도 맺고 길에서 배우는 것들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습니다. 순천은 두 번째 여행인데, 이번 여행은 또 새롭습니다. 선암사와 순천낙안읍성까지 돌아볼 생각인데, 비가 오고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사회 진출을 앞둔 올해의 첫 번째 여행이라는 문희씨는 이번 여행을 통해 자신의 꿈을 정리해 보고, 한국 사회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마음다짐으로 짐을 꾸렸다고 말한다. 봄꽃처럼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기록으로 추억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꽃 피는 봄의 시절처럼 젊은 청춘의 시절처럼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고향집만 같은 순천낙안읍성으로 길을 잡는다. 낙안읍성(樂安邑城)은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고택과 초가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통민속마을로 아직도 가가호호 사람들이 그대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특히 마을은 둘레 1384m의 조선시대 성곽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그 온전한 외형과 견고함에 감탄하게 되는 곳이다. 읍성은 성벽과 동·서·남 문지 옹성 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대성전이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우중(雨中)의 동행인이 된 문희씨의 발걸음이 초가의 담장에 화들짝 피어난 매화꽃에 주춤주춤 머무른다.

매화향 가득 피어나는 순천향매실 마을

매화향 가득 피어나는 순천향매실 마을

“비가 오니 더 운치가 있고 몽환적이고,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더욱 정감이 갑니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마치 정말 조선시대에 온 듯한 착각이 들어요. 특히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소박해서 마치 옛 마을, 옛 한국의 풍경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꼭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문희씨에게 조선족 동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부모와 그 이전 세대의 본래적 마음앓이가 가슴에 닿아지는 순간이다. 앞으로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국 관광에 일조하고, 한국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큰 꿈을 키우는 장문희씨. 그에게 낙안읍성은 마치 타국살이에서 느꼈을 한국인으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 있는 여행길이었을 것이다. 성벽 위를 걸어가며 주춤주춤 발걸음을 멈추는 그에게 오늘의 여행이 삶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기를 기대한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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