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생도 체력 평가가 여성차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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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여군에 대한 전통적인 진입장벽은 무너져 내리는 추세다.
그렇다고 군인으로서 기본적인 체력의 중요성이 간과돼서도 안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는 권기옥 여사였다. 1919년 당시 평양 홍의여학교에 다니던 권기옥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고, 출옥 후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권기옥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배웠다.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시정부 측에 조선총독부를 폭격할 비행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기옥은 생전에 언론 인터뷰에서 “나의 소망이었던 조선총독부 폭격을 끝내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생도의 수석 졸업 이미 여러 차례
권기옥은 돈이 없어 비행기를 구입하기 힘든 임시정부를 떠나 국민당 정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권기옥은 일본의 도발로 잇달아 터진 만주사변(1931년)과 상하이사변(1932년)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권기옥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 구실을 했다.

육사 69기 여성생도들. / 홍도은 기자

육사 69기 여성생도들. / 홍도은 기자

초창기 여성 파일럿은 권 여사 외에 배우 장진영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청연’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박경원, 이정희 여사 등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비행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여자항공대장으로 복무하며 후진 양성에 나섰다.

이후 공군은 1997년 육·해·공군 가운데 가장 먼저 여성을 공군사관학교 생도로 받아들였다. 이때 입교한 박지연, 박지원, 편보라 등은 정규 비행교육과정을 마치고 2002년 첫 여군 조종사로 기록된 데 이어 2007년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그런데 지난주 공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수석을 차지한 제62기 졸업생 여생도의 상훈을 놓고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공군사관학교가 이 여생도에게 체력검정 수준 등 단서조항을 이유로 대통령상이 아닌 국무총리상을 주기로 방침을 정한 게 발단이었다.

그러자 국회 국방위원회까지 나서 공군의 결정을 비판했다.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학교(공사)에서 여성이라고 불이익을 주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같은 당 손인춘 의원은 “불공정 사례”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과 육사 생도대장 출신의 같은 당 백군기 의원까지 거들었다.

지난 2010년 10월 공군사관학교 첫 여성생도 합격자 간담회 모습. / 경향신문

지난 2010년 10월 공군사관학교 첫 여성생도 합격자 간담회 모습. / 경향신문

결국 공군사관학교는 여생도에게 대통령상을 수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를 놓고 한 공군 고위 간부는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군인으로서 체력도 중요한 평가항목”이라며 “곤혹스럽다”고 밝혔다. 공사에선 4년 전인 58기 졸업식 때도 당시 수석 졸업이 예정됐던 여생도가 공수훈련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결격사유가 적용돼 막판에 교체된 사례가 있다.

다른 공군 관계자도 “여생도와 2등의 점수 차이는 4.3점 만점에 0.02점에 불과하다”며 “그러나 여생도는 2학년 때 군사학에서 D등급, 체력검정에서 C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수상자로 부적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관학교의 대통령상은 졸업생도를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심의한다”며 “육사의 경우에도 성적 1위자가 대통령상을 수상하지 못한 적이 꽤 있다”고 말했다.

한국군 전 전투병과에 여군 진출
공사가 여생도에게 수석 졸업의 영예를 주기 싫어서 편법으로 1위와 2위의 순위를 조정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실 사관학교에서 여생도의 수석 졸업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해군사관학교는 2004년 김근향 생도를 시작으로 3년간 여생도가 수석 졸업을 휩쓸었다. 2013년 수석 졸업자도 김하늘 여생도였다. 공군사관학교 역시 2003년 수석 졸업자인 황은정 생도를 비롯해 이미 4명의 여성 수석 졸업자를 배출한 바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해군이나 공군보다는 늦었지만 2012년 윤가희 여생도가 마지막 성역을 깨고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도 양주희 생도가 수석 졸업을 해 여성 생도가 2년 연속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 생도들이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체력과 관련한 언급을 빼놓지 않았는다는 점이다.

윤가희 생도는 수석 졸업 소감을 말하면서 “육체적으로 남생도들과 훈련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고, 양주희 생도 역시 “4년간 학업과 체력단련에 집중했다. 힘들 때마다 달리기를 하며 체력을 다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양주희 생도는 마라톤 풀코스(42.195㎞)를 완주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관학교 생활에서 체력은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선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군에서 여군의 참여도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신체적 무리가 따를 수 있는 기갑, 잠수함 등 극히 일부 분야 외에 육군의 보병 소대장과 특전대원에서부터 해군의 전투함 요원,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전투병과에 여군이 진출해 있다. 공군 조종사들의 전투기량을 측정하는 공중사격대회에서도 여성이 두드러진 성적을 내고 있다.

게다가 전쟁의 개념이 개인의 육체적 능력이 중시되는 섬멸전에서 하이테크 전략무기로 적 지휘부를 무력화하는 제한적 타격전으로 바뀜에 따라 여군의 활동영역은 더 넓어질 것으로 군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현대전에서는 ‘전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수㎞ 후방에 위치한 야전 통신부대의 여군도 미사일 공격 밑에서는 소총수와 같은 위험에 처한다. 전투와 최전선의 개념이 모호해진 것이다. 이라크전 등 몇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최전선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 국방부는 얼마 전부터 여군에 대한 전투임무 배치 금지 규정을 폐지했다.

나아가서 미군은 특수부대에까지 여군을 투입해 2015년부터 훈련을 실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2015년 7월, 해군은 2016년부터 여군의 특수부대 배치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으로 여군의 참여가 금지됐던 네이비실과 레인저 등 특수부대에서도 여군을 볼 수 있게 된다. 데미 무어가 네이비실 특전단 훈련생도로 나왔던 할리우드 영화 ‘지 아이 제인’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군에서 여군에 대한 전통적인 진입장벽은 무너져내리는 추세다. 그렇다고 군인으로서 기본적인 체력의 중요성이 간과돼서도 안 된다. 

공군이 수석 졸업생을 결정하면서 체력적인 요소를 감안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판국에 정치권이 나서 여성에 대한 차별, 불공정으로 몰아가는 것이 그리 좋은 광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박성진 경향신문 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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