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의 흔적, 군산으로의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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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항. 오직 상처로 기억된 채, 침묵의 역사로 존재해 왔던 근대 역사가 아픔을 들어내고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하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군산의 원도심과 옛 군산항의 내항 풍경은 상처로 각인된 아픔의 역사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식된다. 개항 10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1930년대의 시대적 풍경이 남아 있는 군산의 옛 풍경으로의 여정은 침묵의 시간을 거슬러올라 우리 근대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여정의 시작점이다.

군산 월명산 아래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 금광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묻혀 있는 근대 가옥과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거리다.

군산 월명산 아래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 금광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묻혀 있는 근대 가옥과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거리다.

금강하구 끝 황해 관문항의 역사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이라는 새만금간척사업의 상징인 새만금방조제를 지난다. 군산과 부안을 잇는 방조제를 따라 김제·만경평야를 일컫던 금만평야를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로 새만금이라 불린다. 본래 김제, 만경, 군산, 옥구의 들판은 우리 땅에서 가장 비옥하며 너른 들판을 대표하던 곳이다. 호남벌의 중심을 이루던 이 들녘은 금강과 만경강의 물줄기가 흘러 늘 풍년가가 드높은 풍요로운 생산의 들판이었다. 그 들녘 서쪽에 자리한 군산은 금강의 물줄기가 비로소 황해와 접하는 경계에 자리한다. 때문에 군산항은 평화 시에는 무역항으로서 번영을 누렸고, 외적의 침입 시에는 전쟁의 현장이 되는 입지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기벌포 전투, 고려시대에는 진포대첩의 현장이었고, 고려말 조선초에는 서해안 일대에 왜구의 출몰이 잦아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조선초 군산도에 수군 진(鎭)을 설치하고 세종 8년에 ‘군산진’이라 명명한다. 군산진은 군산진성을 갖춘 병영으로 중함 4척, 별함 4척의 전함과 군사 461명, 초공 4명이 근무하고 정6품인 수군만호가 이를 관리했다. 이에 충무공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며 군산진을 중요시 여겼다고 전해진다. 또 군산항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호남지역의 세곡을 저장하고 운반하던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진성창,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근대문화박물관 인근에 군산창이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군산은 근대 개화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본 상인들의 거점지로서 일제 수탈의 현장이 되고 만다. 대한제국은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외국인의 통상 거주지인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 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 이후 군산은 일본에 의해 종속되면서 왜곡된 성장을 겪는다.

근대문화의 이해와 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로써 군산은 해석되고 이해된다. 서구에서 근대의 상징을 자유와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본다면, 우리 근대사는 개화의 시점에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까지로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가 우리의 근대 역사다. 그 근대의 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군산이다.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발판이 되며 수탈항으로 변모한다. 군산이 고향인 근대 풍자문학의 대가인 소설가 채만식은 군산의 내항을 소설 <탁류>의 배경으로 그렸다.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이라는 새만금간척사업의 상징인 새만금방조제.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이라는 새만금간척사업의 상징인 새만금방조제.

<탁류>는 금강의 물길이 서해로 합류하는 군산항의 째보선창을 배경으로 쓰여진다. 개항 이후 일제의 혹심한 수탈의 통로로 변모한 군산항을 배경으로 1930년대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은 장편소설이다. 당대 민중 현실의 궁핍상과 수난사를 1930년대 당시의 리얼리티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째보선창에서 만난 노년의 어부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에는 항구뿐 아니라 온 사방이 싸래기 눈이 내린 것처럼 희뻔거렸다고 했응께. 저걸 부잔교라 허는디, 배가 드나기 쉽게 오르고 내리는 뜬다리여. 이 짝으로 쌀을 실어나르는 왜놈들이 눈까리를 희뻔덕거리면서 밤낮으로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허요. 어른들 말로는 군산시내 땅바닥에는 온통 쌀알갱이들이 눈 내린 거 맹크로 하얗게 쌓였었다고 허드만. 봄이면 사쿠라가 피는 전군가도도 모두 그때의 흔적이랑께.”

침묵으로 기억되는 백년 전의 생채기
일제는 쌀을 쉽게 운송하는 신작로를 닦는데, 그것이 바로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가도이다. 일제는 군산 옥구의 들판을 반듯한 경지로 만들고 농장화를 추진해 억압과 수탈의 강도를 높인다. 4월 즈음의 늦은 봄에 벚꽃이 만개하는 전군가도는 바로 한민족을 억압하는 수탈의 길인 것이다. 째보선창 인근에서 옛 군산세관을 둘러본다. 근대 문화유산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건물로 1990년대까지 실제 세관 건물로 사용됐다. 화강암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군산으로 드는 초입의 개정면 발산초등학교에는 당시 일본인 대지주였던 시마타니의 철제대문형 금고가 아직도 남아 있다.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등을 보관하던 3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금고로 발산초등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의 개정동에 자리한 이영춘 가옥 역시 근대 역사의 흔적이다. 1920년께 일본인 대지주인 구마모토가 지은 별장으로 국내 1호 의학박사인 이영춘 박사가 사용했던 가옥인데,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번영로를 따라 옛 군산역으로 돌아들어 원도심의 대로였던 중앙로와 영동상가로 방향으로 발길을 잡는다. 개항 이후 일제는 군산에 목포영사관 분관을 설치하고, 1906년 군산이사청이 개설되면서 군산을 장악한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 비교적 장식이 없는 전통적인 일본 사찰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 비교적 장식이 없는 전통적인 일본 사찰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인들은 토지를 확보하고 부를 축적해 나갔다. 영동상가는 당시 군산 최고의 번화가로 상점들이 들어선 거리다. 일본인들은 이 거리를 행정구역상 영정이라는 표현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카에마치라 불렀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송방거리, 송방골목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곳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조선인들 중에 개성상인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군산에는 1200여명의 화교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규모 무역상은 영화동 일대에서 포목상을 운영하였고, 영동상가에는 식료품과 잡화취급 상점 등을 운영하였다. 영화동을 지나 월명산까지 이르는 원도심에는 근대 역사의 아픈 생채기들이 구석구석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빵집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성당 김현주 사장은 “1945년 광복을 맞던 해에 문을 열었습니다. 유래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일본 사람이 ‘이즈모야’라는 이름으로 제과점을 만들었다가 광복 이후 ‘이성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됐어요. 당시 창업자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이성당’이 됐고요, 이후 가족이 대대로 68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군산에는 저희 가게뿐 아니라 오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시대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빵집 김현주 사장. 가족이 이 빵집을 68년간 이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빵집 김현주 사장. 가족이 이 빵집을 68년간 이어오고 있다.

이성당을 지나 군산의 대표적인 산인 월명산 아래 일본식 가옥이 들어선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 금광동 일대를 돌아본다. 사람들이 실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주택에도 일본 가옥의 형태들이 남아 있다. 일본식 가옥인 히로스 가옥과 동국사, 해망굴 등 근대문화의 흔적이 골목골목 이어진다.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우리 사찰과 다르게 단청이 없으며 비교적 장식이 없는 모양새로 전통적인 일본 사찰의 특징을 보여준다. 히로스 가옥의 내부도 살펴보고, 해망굴을 지나 군산 내항을 따라 장미동 인근의 근대문화 유적지를 둘러본다. 1923년 일제 식민지 정책의 본산이었던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역시 아직도 장미동에 남아 있다. 조선은행이 있는 ‘해망로’를 따라 내려오면 옛 장기십팔은행 군산지점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일제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항. 오직 상처로 기억된 채, 침묵의 역사로 존재해 왔던 근대 역사가 아픔을 들어내고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하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역사가 전해주는 말을 통해 당대 삶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는 삶의 기록이다. 침묵하여 잊혀질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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