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덕스러운 산천, 순창의 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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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인 서거정은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논밭이 풍요로우며, 어장 또한 넉넉해 우리국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했다.

이 땅은 참말로 천연덕스럽다. 천연함과 천연덕스러움과의 차이를 말할 때, 순창 땅과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순창의 산과 강, 땅은 자연스럽고 순진스럽다. 때를 덜 탄 까닭에 순창 사람들의 얼굴은 맨 얼굴처럼 천연하고 순박하다. 강건한 산의 기세와 넉넉한 물길의 흐름이 굽이치는 순박한 마을을 따라 차오르는 생의 기운을 맨발로 걷는다.

순창은 산이 깊고 물이 맑으며 사람들 역시 천연덕스럽고 온화하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움이 천연이라면, 때 묻지 않은 천연한 심사에 한 술쯤을 더 보탠 넉넉함이 포함된 것이다. 순창 사람을 처음 마주하는 인상 역시 천연덕스러움에 가깝다. 곱게 주름진 늙은 이의 인상은 순박하고 온화하며 자연스럽다.

무량산 자락 아래 자리한 거북장수 구미(龜尾)마을은 섬진강 거북이길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무량산 자락 아래 자리한 거북장수 구미(龜尾)마을은 섬진강 거북이길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순리에 맞고 후덕하며 무심에 가까운 인상이다. 도시 사람처럼 치장하여 꾸민 얼굴이 아니며, 마음에도 없는 미소나 부담스러운 몸짓도 없다. 맨 얼굴로 천연덕스레 웃는 태도가 순창의 풍경이 주는 인상이다. 천연덕스러움은 자연스러움에 순진함과 부끄럼을 보탠 염치 있는 감정으로 아무 흠집 없이 말끔한 인상이 아닌, 투박하고 흉 하나쯤은 있음직한 잘나지 않은 인상에 걸맞다. 이러한 인상은 ‘되어지는 만큼 되어도 좋다’는 저절로의 순리에 가깝다. 그 때문일까, 순창은 오래도록 평안한 장수(長壽)의 고장을 대표한다.

이 땅 고을고을에는 100세 남짓의 고령자가 수두룩하다. 무량산 자락 아래 자리한 거북장수 구미(龜尾)마을 역시 무병장수의 마을이다. 구미마을은 마을 입구에 있는 거북 형상의 바위 꼬리가 마을로 향한 모습이라 하여 ‘거북이 꼬리’란 뜻으로 불린다. 마을을 찾는 방문객을 안내하는 양병완씨는 “우리 마을은 630년 동안 이어온 한성받이 마을(하나의 성으로 이뤄진 씨족마을)입니다. 주민의 90%가량이 남원 양씨로 1960년대 구미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학생 모두가 남원 양씨로 전국에서 유일한 씨족학교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남원 양씨 종갓집이 남아 있고, 남원 양씨 종중문서와 과거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홍패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라며 마을의 오랜 역사를 설명한다. 마을회관에서 종갓집 가는 골목을 따라 오르자 벽화가 마을 담장에 그려져 있다. “홍패는 일종의 과거 합격증서이지요. 홍패를 하사하는 행렬을 그려놓은 것이구먼요.” 이제 구미마을은 ‘섬진강 거북이길’의 기점이 되는 곳으로, 농촌체험 휴양마을과 트레킹을 즐기는 길꾼들이 쉬어가는 길목이다.

휘감아도는 섬진강 장군목

마을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양병완씨가 구미마을의 역사를 설명한다.

마을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양병완씨가 구미마을의 역사를 설명한다.

구미마을을 기점으로 섬진강을 따라 조성된 섬진강 거북이길을 따라 걸으면 산들이 빙 둘러 늘어서고 강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섬진강 상류다. 순창의 섬진강은 아랫녘 곡성과 하동까지의 섬진강 하류와는 사뭇 다르다. 하류의 섬진강이 부드러운 물길과 모래톱의 곡선미, 재첩잡이 어미로 연상되어 다분히 여성적이라면, 순창의 섬진강은 남성적이다. 높은 산세의 물가름이 모여든 강줄기는 힘센 남정네의 기운으로 역동적이다. 강심과 강가에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위들의 위용도 웅장하다. 2㎞ 남짓의 강길을 따라가면 순창 제일의 명당이라 불리는 어치리 내룡마을의 장군목이 나온다. 500리 섬진강 물줄기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원시적인 구간이다.

이곳 내룡에서부터 풍산면 대가리 향기마을까지 24.2㎞에 걸쳐 순창의 동쪽 땅을 흐르는 이 강을 지역사람들은 적성강이라 부른다. 장군목이라는 이름은 서북쪽으로 용골산과 남쪽으로 무량산의 봉우리가 마주 서 있는 풍수의 형상을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 부르는 데에서 연유한다. 흔히 마을사람들은 장구의 목처럼 좁아진다고 하여 장구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군목은 강바닥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거대한 바위의 살아움직이는 듯한 군무를 보는 듯하다. 수만년 동안 거센 물살이 다듬어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에 걸쳐 드러나 있는데, 큰 거북은 강심을 차지하고 작은 거북들이 강가에 모여 노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연꽃바위, 자라바위, 요강바위 등 기기묘묘하게 움푹 파인 바위들은 원시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 중 강심에 자리한 ‘요강바위’는 바위 가운데가 요강처럼 움푹 파여 있다. 높이 2m, 3m에 무게가 무려 15t이 된다는 요강바위는 깊은 웅덩이가 파여 있는데, 한국전쟁 때 마을주민이 바위 속에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아이를 못낳는 여인네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마을사람들이 수호신처럼 받드는 이 바위를 한때 배짱 큰 도둑이 통째로 훔쳐가기도 했다. 하지만 도난 후 1년 6개월 만에 제 자리를 찾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고 있다.

해발 584m의 강천산(剛泉山)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품이 고요한 덕산(德山)이다.

해발 584m의 강천산(剛泉山)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품이 고요한 덕산(德山)이다.

산과 물이 만나는 명당의 산천
예부터 살기 좋은 천혜의 명당으로 인정받던 곳이 바로 순창의 풍수다. 노령산맥의 끝자락쯤에 위치한 순창은 호남정맥 줄기의 산간지대에 있다. 섬진강 물줄기와 강천산 등의 천연한 기운을 지닌 땅이다. 조선의 지식인이었던 서거정(1422~1488)은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산수가 아름답고 논밭이 풍요로우며, 물가의 어장 또한 넉넉해 우리 국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했다. 때문에 예로부터 옥천골이라 불릴 정도로 맑은 물, 수려한 자연을 자랑했다. 또 몇몇 풍수학자들은 순창의 물 흐름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제 안에서 돌고 도는 형국이어서 땅의 기운이 으뜸이라고 일컬었다.

전북 장수군과 진안분지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순창 땅에 들어서면, 단 한 방울도 다른 고을로 흘려보내지 않고 순창의 온 들판을 다 적시고 나서야 다시 순창의 섬진강 굽이로 모였다가 곡성 쪽으로 흘러간다. 순창에 맞춤말로 붙어 다니는 순창 고추장 역시 천연한 기운의 산물이다. 섬진강의 물길과 산 계곡의 바람은 연평균 13도 내외의 기온으로 생기(生氣)가 되어 순창만의 알싸하고 칼칼한 특별한 장맛을 내는 원천이다. 산 그림자 아래 볕이 드는 시간이 일정하고, 섬진강 자락에서 흘러내린 차갑고 맑은 물길이 고추를 강건하게 키우는 것이다.

순창 제일의 명당이라 불리는 어치리 내룡마을의 장군목.

순창 제일의 명당이라 불리는 어치리 내룡마을의 장군목.

순창 사람들이 고추장 말고도 자랑으로 삼는 것이 바로 강천산(剛泉山)이다. 해발 584m의 강천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품이 고요한 덕산(德山)이다. 순창군 팔덕면과 전남 담양군 용면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은 본래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 불렸다. 호남의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데, 1982년 전국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천혜의 비경을 보전하고 있다. 매표소를 출발해 금강교에 다다르면 병풍바위가 눈앞에 위용을 펼친다. 두 줄기의 물줄기가 마치 너른 폭을 펼친 듯 큰 물줄기를 쏟아내는데, 병풍폭포이다. 강천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맨발로 산길을 걷는 산행객들이다. 계곡 따라 호젓한 십리 길을 맨발로 걷고 목책 산책로를 거닐며 마음의 때를 훌훌 털어버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 숨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순례자의 모습처럼 평안하다. 잘 다져진 흙길 양 옆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숲은 청춘의 여름처럼 푸르고 높다. 강천사 일주문을 지나 단풍과 은행나무가 만든 숲터널을 지나자 통일신라시대인 887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강천사가 고즈넉하다. 강천사에서 다시 10여분 남짓을 오르니 현수교와 전망대가 나타난다.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을 가려면 이 현수교를 지나야 한다. 50m 높이로 하늘을 가르듯 놓여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발 아래로 강천산의 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왕자봉 정상에 오르자 산성산과 광덕산이 어우러진 경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과하지 않은 산세가 편안하고 아랫녘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천연하고 순하게 마을을 적시며 돌아나간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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