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속의 섬, 영주 무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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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외나무다리 역시 해마다 다시 띄우고 있다.

아슬아슬한 외나무나리를 건너는 학동들의 발걸음이 위태위태하다. 마을 총각이 장가가는 날에도 다리를 건너고, 수줍은 새색시도 꽃가마 타고 다리를 건넜다. 세상 떠난 이도 꽃상여 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황천길로 갈 수 있었다.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무섬마을을 찾아간다.

긴 의자를 잇대어 놓은 듯한 외나무다리는 마을사람이 외지로 나가는 통로다.

긴 의자를 잇대어 놓은 듯한 외나무다리는 마을사람이 외지로 나가는 통로다.

매화가지에 꽃 핀 모양새로 물 위에 뜬 섬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가 흩날리는 강변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 무섬마을로 들어간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무섬은 말 그대로 ‘물 위의 섬’이라는 뜻이다. 안동 하회마을과 같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을 한 전형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과 숲, 은백색 모래톱이 고색창연한 고가(古家)와 어우러져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낸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영주 시내를 지나온 서천과 태백산에서 발원해 봉화를 거쳐온 내성천이 합류하여 마을을 350도 휘돌아 나간다.

마을 들머리에서 한평생 무섬에서 살았다는 어르신을 만났다. “옛 어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연화부수(蓮花浮水)라 하기도 하고, 마치 초봄에 ‘매화 가지에 꽃이 피는 것이랑 비슷하다고 ‘매화낙지’라고들 혔지. 말 그대로 물 우에 뜬 섬 아녀. 그려서 한자로 수도리(水島里)가 된 거니 께네.” 새하얀 모래톱이 마을을 빙 둘러 감싼 것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육지 한가운데 섬처럼 오롯하니 산수의 어울림이 빼어나다. “참말로 경치 좋지라. 여기서 평생을 살았는데, 세상 어디를 가도 우리 마을같이 이쁜 디가 없드만. 여가 알아주는 명당이구먼.”

하지만 마을은 외지와 동떨어져 자못 고립된 형국으로 마을을 감아 도는 물길 때문에 드나들기 쉽지 않다. 마을 앞으로 물이 흐르고, 모래톱이 2만6500㎡가 넘으니 논밭을 만들 공간 역시 넉넉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을사람들은 강을 건너 12㎞를 걸어서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 마을에 다리가 놓인 것이 불과 30여년 전 일이다. 그 이전만 해도 마을사람들은 들일을 하러 가거나 읍내 장에라도 나갈라 치면 홑바지를 걷고 첨벙첨벙 물을 건너거나 헤엄을 쳐야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군용보트에 타고 강을 건너 피난길에 나섰다.

“마을에서 장정들이 해마다 봄이면 외나무다리를 물 위로 띄우는데, 농사 지으러 가는 다리, 장 보러 가는 다리, 아이들 학교 가는 다리까지 모두 세 개를 띄웠어라.”

이 마을로 시집와 60년을 살아온 늙은 어미가 지난 세월을 더듬는다. 이미 팔십 준령을 훌쩍 넘은 장두진씨(86)가 홀로 100년이 넘은 고가를 지키고 있다. 장씨 할머니는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가마를 타고 저 다리를 건너 시집왔다.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가마를 타고 시집온 장두진 할머니. 이미 팔십을 훌쩍 넘겼고, 홀로 100년이 넘는 고가를 지키고 있다.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가마를 타고 시집온 장두진 할머니. 이미 팔십을 훌쩍 넘겼고, 홀로 100년이 넘는 고가를 지키고 있다.

“여기는 사방천지가 모래 아녀. 우물을 파도 물이 잘 안 나는 땅이여. 그래서 농사가 힘드니께 강 건너 마을에 땅을 일궈서 농사를 졌제. 여름에 농사일을 할라치면 배를 타고 나가야 했으니까. 근데 물이 불어나면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어. 그래도 물곁이라서 농사가 잘 되는 편이라 사는 형편들은 이 근방 마을에서 제일로 나았구먼. 그래서 마을로 경상도 근방의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사는 재미는 좋았어라.” 외나무다리는 여름철에는 쓸모가 없었다.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다리를 놓고 철거를 반복해야만 했다. 번잡스러운 일이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다.

긴 의자를 잇대어 놓은 듯한 외나무다리는 마을사람들이 외지로 나가는 출구이기도 했지만, 보따리장수나 외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무섬마을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경상도 동해안의 해산물을 비롯한 타 지역의 특산품이 모여들 정도로 번성했다. 그때는 외지인들이 섣불리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빠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무섬마을을 드나들 때 마음 수양을 하고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했다. 체통 없이 가벼이 굴거나 거드름을 피우다가는 폭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큰기침깨나 하는 양반네도 팔자걸음으로 건널 수 없는 게 외나무다리다. 외지에서 찌든 때를 모두 벗어버리고 마음 중심을 아래로 두어야 자빠지지 않는 것이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는 요령이라면 요령이었다.

“양반이건 상사람이건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는 위아래가 없지 않어. 누가 먼저 올라섰느냐에 따라 위아래가 정해지는 이치니께네. 한 발짝이라도 앞선 사람이 건너올 때까지 양보하고 엇갈리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는 것이 외나무다리의 법이었구먼. 예전 어른들 말로는, 그게 조금씩 양보하고 나누고 사는 바른 이치라고 혔구먼.”

그래서일까. 무섬마을은 근방에서 경우 바른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리를 들어왔고, 영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반촌(班村)으로 이름이 높았다. 마을 들머리에서 수도교를 건넌다. 1983년 놓여진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이후 무섬으로 드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외나무다리는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외나무다리 역시 해마다 다시 띄우고 있다.

수백 년 역사와 정신 그대로의 전통마을
이 마을의 역사는 1666년 반남(潘南) 박씨가 마을에 처음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이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두 집안이 오래도록 세월을 함께 한 셈이다. 지금도 마을은 이 두 성씨가 주를 이루어 수백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나지막한 돌담이 이어진 길을 걸으니 전통가옥 40여 가구가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들어앉았다. 마을에는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향취를 풍긴다. 마을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마주하는 고가가 해우당 고택.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이 지은 가옥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특징인 ㅁ자형 구조이다. 편안한 풍채가 인상적인데, 사랑채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나지막한 돌담이 이어진 길을 걸으며 전통가옥 40여 가구가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들어앉았다. 마을에는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향취를 풍긴다.

나지막한 돌담이 이어진 길을 걸으며 전통가옥 40여 가구가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들어앉았다. 마을에는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향취를 풍긴다.

마을의 고가는 대부분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이어받기 위함이다. 마을을 둘러보면 만죽재 고택을 비롯해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있다. 그 중 김뢰진 가옥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댁이다. 시인은 이 마을에 잠시 머물며 사랑하는 부인을 무섬마을에 두고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별리’(別離)라는 시로 노래했다. 마을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 아도서숙이 자리하고 있다. 아도서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10월 무섬마을 해우당 출신 김화진 선생의 주도로 마을 청년들이 세운 공회당이자, 주민 교육기관이다. 193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교육과 농업기술 교육을 실시했고,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무섬마을은 지형적 특성에 힘입어 조선시대, 한국전쟁 등 여러 번의 난리를 겪고, 이런 저런 천재지변을 거치면서도 원형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마을주민들의 마을 사랑과 자부심은 매우 크다. 옛 모습과 정신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500년 전통의 자긍심이다. 어쩌면 외나무다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터전을 일구어 삶을 꾸려온 옛 어른들의 지혜의 산물일 것이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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