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낭만, 고궁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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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여름의 로마만큼 멋진 곳도 드물다. 도시 외곽의 카라칼라 욕장터에서 열리는 야외 오페라 공연 때문이다. 시야가 탁 트인 대규모 유적지에서 화려한 선율의 문화적 산물들을 만끽할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대 위 세상에서는 개선하는 이집트의 라다메스 장군이 실제 말을 탄 기마병들과 함께 위풍당당한 개선 행진을 벌이기도 하고, 투란도트의 잠 못 이루는 밤이 황금빛 무대 위에서 꿈결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배우들의 기량이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무대 자체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줄거리에 맞춰 옛 유적을 비추면 객석은 이미 환상 속이다. 그 모습 그대로 비할 바 없는 훌륭한 무대이자 멋진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뮤지컬 <천상시계>

뮤지컬 <천상시계>

8월이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리는 불꽃놀이도 마찬가지다. 매주 수십만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한밤의 고궁 속 낭만을 즐긴다. 옛 모습을 그대로 재연했다는 수십여개의 분수들은 현대식 전기조명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연주와 조화를 이루며 감탄을 자아낸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잔디밭 위로 길게 늘어선 불기둥 장식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해낸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캐슬의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밀리터리 타투도 역사가 문화라는 향기로 포장돼 사람들의 머릿속에 감동을 각인시키는 비슷한 부류의 볼거리들이다. 문화재가 단순히 보존의 대상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대와 대면하고 호흡하며 실존하는 살아있는 체험으로 재구성되는 시도들이다.

우리도 도심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재미난 실험이 있다. 봄·가을이면 경희궁에서 열리는 고궁 뮤지컬이 그렇다. <명성황후>, <대장금>, <왕세자 실종사건> 등 인기 창작 뮤지컬 레퍼토리를 이어가더니 올해는 또 다른 역사 뮤지컬의 막을 올리며 공연 마니아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 총애했다는 발명가 장영실을 소재로 한 뮤지컬 <천상시계>다. 물론 그가 만든 희대의 발명품들에 무대적 상상력을 덧붙인 내용이다.

뮤지컬 <천상시계>

뮤지컬 <천상시계>

뮤지컬로 만나보는 <천상시계>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신선하다. 우선 우리 가락과 정서를 무대적 문법에 맞춰 뮤지컬이라는 대중적인 형식으로 재가공해낸 제작진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여기에 이름은 유명하지만 실제 어떤 인물인지는 베일 속에 가려진 발명가 장영실의 뒷이야기가 엮어지며 감칠맛을 더한다. 실록에는 장영실이 어가를 엉성히 만든 죄로 곤장을 맞고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극 안에는 이런 이야기가 등장할 수밖에 없던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갈등이 그럴싸하게 포장돼 보는 재미를 완성해낸다. 요즘 주말 TV를 꽉 잡고 있는 역사 소재의 인기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야외무대라서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날씨다. 우리의 고궁 뮤지컬은 전통적인 여름 우기를 벗어난 봄과 가을에 열리지만, 덕분에 대부분 관객들이 견뎌내야 하는 차가운 가을 밤공기는 피할 수 없는 난제다. 게다가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아예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 물론 반대로 날씨만 좋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매력적인 밤을 보낼 수 있다. 번잡스런 신문로에서 겨우 몇십 걸음 들어섰을 뿐이지만 잔디로 둘러싸인 고궁의 밤 풍경은 감히 비할 데 없는 낭만스러운 정취를 만들어준다.

문화의 매력은 다양한 변주에 있다. 고궁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공연은 문화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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