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른이란 작은 마을에 어느날 갑자기 시커먼 쥐떼가 나타났다. 무슨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 쥐떼 때문에 절망에 빠진 마을 사람들 앞에 홀연히 한 사나이가 나타난다. 그는 막대한 보상을 대가로 쥐들을 사라지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피리 연주를 통해 정말로 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나이에게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았고, 결국 사나이는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꾀어내 모두 데려가 버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다. 극단 코끼리만보의 신작 <피리 부는 사나이>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이 동화를 소재로 현대 우리 사회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작가인 후안 마요르가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어른들의 무관심과 거짓말, 욕망으로 인해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이야기로 보았고, 이는 하멜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러 도시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작품 <피리 부는 사나이>(원작은 ‘하멜른’)에서 어느 도시에서 발생한 아동 성추행 사건과 이를 둘러싼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 무관심을 그려내고 있는데, 최근 우리 사회를 격분시켰던 아동 성폭력 사건과도 연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주인공 몬테로 검사는 아동 성추행 사건을 제보받고 수사에 나선다. 피의자는 빈민층의 청소년을 구제하는 데 앞장서온 존경받는 사회운동가 리바스. 자신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는 리바스에게서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해 수사가 흐지부지되는 가운데, 검사는 극빈층인 피해자 소년의 부모가 리바스로부터 돈을 받고 아이를 그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수사과정 내내 검사의 아들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다 퇴학을 당하고, 자신의 아들과도 피해자 소년과도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검사는 처음으로 소년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건넨다.
작품에서 소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외적으로 볼 때 위선자 리바스이지만 사실 그런 상황에 이르게 한 장본인은 그의 부모이고, 그들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 사회 역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또한 자기 일에만 매달리며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검사 몬테로나 자극적인 기사로 여론을 몰아가는 기자들, 자신의 지식 안에 소년을 가두고 판단을 내리는 아동심리상담사 역시 아이들을 상처 입히고 버림받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극중 리바스는 검사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괴물이 필요한 거잖아. 이놈이 괴물이니까 나는,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려는 거잖아! 당신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 신문은 한술 더 뜨고. 진짜 범인을 찾아? 웃기고 있네. 진짜 나쁜 놈은 당신이야!” 이는 작품 안에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시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다.
현대 스페인 연극을 대표하는 지성 중 한 사람인 후안 마요르가는 지난 2009년 공연된 <다윈의 거북이>와 올해 초 공연된 <영원한 평화>를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답게 마요르가의 작품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명료한 주제의식이 특징이며, 특히 현대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들곤 한다. 이번 작품 역시 극장을 나설 때면 한 번쯤 되묻게 된다. 하멜른의 아이들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9월 23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