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커피 한잔, 첫사랑을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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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찾아왔다.’
애절한 사랑은 시대를 넘나든다.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만추>(2011)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원작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晩秋)>(1966)다. 만추는 신성일씨가 꼽은 ‘내생애 최고의 영화’다.

좋은 영화는 탐이 나는 법이다.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약속’(1972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년) 등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네 번째 리메이크된 <만추>는 현빈과 탕웨이 주연이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탕웨이가 영화 <색, 계>에서 친일파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3년간 활동 금지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영화 속 경제]고독한 커피 한잔, 첫사랑을 만날까

1966년 <만추>의 무대는 서울이다. 모범수인 한 여자와 위조지폐범이 만나 강렬한 사랑을 나눈다. 2011년 만추는 미국 시애틀이 배경이다. 남편을 살해하고 7년째 복역 중인 애나(탕웨이 분)와 여성에게서 돈을 뜯는 제비인 훈(현빈 분)이 주인공이다.

애나는 표정을 잃어버린 여인이다. 7년의 시간을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런 애나에게 다가가는 남자가 훈이다. 훈은 애나의 말을 들어준다. 중국어로 얘기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애나의 말을 듣는다.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신호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터지고, 웃음기가 돌기 시작한다.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관심이다.

시애틀 하면 생각나는 것이 안개와 비다. 그리고 커피다. 안개와 커피는 영화의 중요한 무대장치가 된다. 안개가 걷히자 애나는 훈이 떠난 것을 안다. 애나는 커피 두 잔을 손에 쥐고 버스로 향하지만 곧 그의 부재를 느낀다. 양손에 쥐어 있던 커피가 흔들리며 쏟아진다. 2년 뒤 출소한 애나가 훈을 기다리는 자리에도 커피가 놓여 있다.

시애틀에는 스타벅스 1호점이 있다. 스타벅스뿐 아니다. 툴리스 커피, 시애틀 베스트 커피 등의 시작도 시애틀이다. 국내에서도 스타벅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프랜차이즈점이 생겨났다. 우리나라가 스타벅스에 지급한 로열티는 2000년부터 2011년까지 12년간 735억원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전 세계적으로 연간 6000억 잔의 커피가 소비된다. 우리나라는 연간 117억 잔, 성인 1명 기준으로 연평균 312 잔을 마신다. 2010년 현재 국내 커피시장 규모는 약 2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고급 커피전문점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것은 ‘파노블리 효과’로 설명된다. 파노블리 효과란 어떤 물건을 사면 자신이 특정 집단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비싼 명품을 사면 나도 명품을 사용하는 집단에 속한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나이키 에어를 신으면 나도 마이클 조던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고, 멘체스터 유나이티드 저지를 입으면 박지성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분위기 좋고 우아한 곳에서 마시는 값비싼 한 잔의 커피는 자신이 우아해진 것처럼 느껴져 돈이 아깝지 않다.

어릴 때 플라스틱으로 만든 청진기와 주사기로 소꿉장난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이 마치 의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세트를 프랑스어로 ‘파노플리(panoplie)’라고 부른다. 장 보드리야르가 1980년대에 제기한 개념이다.

애나는 한 잔의 커피와 머핀을 시켜놓고 훈을 기다린다. 애나가 독백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애나, 그녀, 고독하지만 참 멋져 보인다.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기다리면 잊었던 첫사랑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파노블리 효과, 제대로 받았다.

<박병률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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