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 판 장이 열리는 전주 남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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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성시’를 꿈꾸는 장꾼들의 삶과 이야기

한 판. 두 판. 세 판. 전주남부시장에서는 하루 삼세 판 장이 열린다. 남부시장은 중앙동 -풍남동 - 전동에 걸쳐 있는 전주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새벽 4시 어슴푸레 여명이 트기도 전에 눈비빔을 하는 천변 번개장. 또 동이 터서 해질 무렵까지 온종일 시장을 여는 남부시장 본장. 그리고 전통 재래시장의 문전성시를 꿈꾸며 청년들이 열어가는 야시장, 청년문화장터. 삼세 판 장이 열리는 남부시장에서 장꾼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희망을 묻는다.

남부시장 본통 거리.

남부시장 본통 거리.

댓바람 같은 천변 새벽장
전주천변 남부시장 맞은편. 전주, 완주, 김제, 익산, 군산, 멀리 진안에서까지 달려온 부지런한 장꾼들이 부나비처럼 모여들기 시작한다. 새벽 댓바람에 흔들리는 백열전구의 빛들 사이로 장꾼들이 판을 열기 시작하는 시간은 새벽 4시. 동이 트려면 두어 시간 남짓 남았지만, 새벽장사에 이력이 난 장꾼들의 판놀음은 일사불란하고 날렵하다. “군산 해망동 어판시장에서 새벽 2시에 물건을 받아가지고 오는데, 물건 깔면 얼추 4시쯤이나 될 꺼구만. 아직 깜깜혀 불지만 금방 해가 저 짝으로 올라올 껴. 겁나불게 멋져불지라.”

진종섭씨는 남부시장 본통 골목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 철물점을 하고 있다.

진종섭씨는 남부시장 본통 골목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 철물점을 하고 있다.

장은 상설장으로 매일 새벽 4시부터 아침 9시까지 다섯 시간 동안만 장이 열린다. 10여년 전 천변을 따라 하나둘씩 노점판이 깔리던 것이 이제 그 규모가 상당하다. 생선 어판을 깐 지가 3년 남짓 되었다는 임채준씨(59·전주 완산동) 부부가 분주하게 손님을 맞는다. “사업하다가 실패해서 시작했는데, 명절날 빼고는 맨날 나옹께. 저 짝으로 쨍하고 해 뜨는 것만 봐도 기운 나고, 부지런히 팔문 살만 혀. 날이 새불면 판이 끝나는 것이 좀 흠이지만도. 여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별로 욕심이 없어. 정각 9시에 단속반이 호각을 불면 판이 끝나부러.” 아직 천변시장이 끝나려면 한 시간 남짓이 남은 아침 8시. 천변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주차장터를 지나 본장터로 오르자, 남부시장 본통의 상가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다.

사실 남문밖장, 남밖장이라 불렸던 전주남부시장은 1473년 만들어진 2일·7일 장시의 전통 5일장. 그 역사가 500년이 훌쩍 넘는다. 1894년 동학혁명 이전, 조선 후기까지 전주성의 사대문 밖에는 모두 장이 섰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일제는 전주성의 사대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1923년 남문밖장과 서문밖장을 합쳐 풍남문(豊南門) 옆에 남문밖장을 활성화시킨다. 또 1929년에는 어채시장을 중심으로 한 간이시장을 개설하고, 1930년대 후반 지금의 남부시장 자리에 정기시장으로 재정비한다. 하지만 남문밖장과 천변장터는 해방 이후까지도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역사가 살아있는 남부시장 본통
지금의 2층 상가 형태의 근대시장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68년의 일. 남부시장은 이후에도 완산, 김제, 군산 등을 아우르며 생활용품과 곡식이 거래돼 호남 최대의 물류집산지의 명성을 이어간다. 하지만 지난 1999년 화재 이후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줄고 2층 상가동의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천변 번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임채준씨 부부.

천변 번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임채준씨 부부.

그나마 전주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콩나물국밥집과 피순대국 등의 음식점이 중앙통에 자리해 장터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 국밥집이 모여 있는 골목에는 이른 아침 속풀이에 나선 주당들이 콩나물국밥집과 피순대국집에 몰려든다. 동이 완전히 트자 시장 안쪽에 자리한 가구, 생선, 이불집, 철물점 등도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또 상가 밖 천변 쪽의 외곽으로는 야채가게와 음식점, 작은 노점들이 풍남문 쪽까지 이어져 장의 구색을 채운다.

이 남부시장 본통 골목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 철물점을 하고 있는 진종섭씨(53·대원상회)는 대대로 무쇠솥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시장 건물이 얼추 80년은 족히 되었응께요. 할아버지 때 처음 시장 생길 때부터 해온 것이니까. 아버님을 거쳐 저까지 한 70~80년 장사를 이어왔습니다. 내 나이 열여덟에 가게 일을 했응께.”

진씨는 요즘 관광객들이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일부러 시장통을 찾아오고 있다며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오는 관광객하고 외지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구석에 처박아둔 가마솥을 닦아놨더니, 젊은 사람들이 멋지다고 사가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안 하던 칼갈이도 옛날처럼 다시 하니,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오데요. 덕분에 시장에 활기가 돌고 상인들도 덤도 좀 주며 손님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축제 기간 중 해 떨어지면 2층 장터에서 야시장도 열립니다. 커피도 팔고 재미난 것도 많이 판당게요.”

청년문화장터에서 한글캘리그래피 공예점을 오픈한 하대직씨(왼쪽)와 음악카페를 창업한 새내기 사장 정영아씨(오른쪽).

청년문화장터에서 한글캘리그래피 공예점을 오픈한 하대직씨(왼쪽)와 음악카페를 창업한 새내기 사장 정영아씨(오른쪽).

본래 남부시장은 상가 형식인 2층 구조. 그 규모가 제법 널찍한데, 8개의 상가동이 한 동아리로 연결된 독특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층에 자리했던 상점의 일부가 1999년 화재로 인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어, 지난 10여년의 세월 동안 상가는 방치되었다. “여덟 동이 하나의 광장이었던 셈입니다. 1층장이 땅이라면. 2층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셈인데, 2층의 장터는 마치 하늘에 열린 장터처럼 자유로웠습니다. 그대로 하늘이 뻥 뚫린 옥상이니, 저녁이면 술잔에 달도 기울이고 별을 보며 젊음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삼륜차가 막 달릴 정도로 큰 광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생채기와 추억들이 남아 있는 문화를 중심으로 하늘 아래 열린 광장을 다시 열고 있습니다.”

다시 열리는 하늘시장의 꿈, 청년야시장
다행히 상가 중 4동과 6동에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흔적처럼 남아 있고, 아직도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선술집이 몇 군데 남아 있었다. 이에 전주시와 지역내 사회적기업 ‘이음’, 그리고 남부시장번영회가 손을 잡았고 2008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문전성시’(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500년의 역사를 지닌 남부시장의 수많은 이야기를 다시 청년문화장터라는 이름으로 되살리기로 한 것. 사회적기업 ‘이음’의 최정학 과장은 “지난 여름 옥상 장터 상가 동 중 4동은 하늘정원이라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1층 재래시장의 점포는 청년 장꾼들에게 열었습니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에 전국에서 청년 장돌뱅이들을 불러 모아 ‘잠 못드는 열대야 야시장’이란 장판을 벌여 많은 손님들이 찾았습니다”라며 남부시장이 지역문화의 공간이자 일상의 관광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문전성시’를 꿈꾸는 청년장사꾼들
그리고 이번에는 전주한옥마을 축제에 때맞춰 ‘밤맛남’이라는 이름의 야시장 축제를 열고, 옥상 야시장의 빈 점포 두 곳에 야심찬 청년 장사꾼들의 점포를 연 것이다. 그 중 카페 ‘나비’라는 이름으로 음악카페를 창업한 새내기 사장 정영아씨(32)가 부지런히 손님을 맞이한다. “남부시장은 전주한옥마을처럼 문화와 역사가 담긴 공간입니다. 재래시장은 그 세월만큼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밤마다 열리는 청년야시장의 풍경.

밤마다 열리는 청년야시장의 풍경.

시장 속의 특별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바로 앞 점포에 한글캘리그래피 공예점을 오픈한 하대직씨(30) 역시 “시끌벅적하고 정이 넘치는 전통시장 자체가 관광상품입니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소통의 공간으로, 이 2층의 공간이 문화의 광장으로 다시 열리기를 기대합니다”라며 “남부시장에서 성공하고, 여세를 몰아 전국의 모든 전통시장에 캘리그라피 가게를 여는 게 창업 목표”라고 덧붙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한 두 청년 장사꾼. 그들의 포부는 역시 젊고 밝다.

“전통시장에 참신하고 발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더해지면 문화가 있는 풍물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2층에 30여개 빈 점포가 남아 있습니다. 내년에는 저희와 같은 청년 장사꾼들이 하나둘씩 가게를 채워나갈 것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넘치고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문전성시의 꿈. 오백년 남문밖장의 명성을 우리 청년 장사꾼이 이어갈 것입니다.”

글·사진|이강<콘텐츠 스토리텔러·여행작가>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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