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주식은 판도라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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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몇몇 유력 재벌가에서 ‘차명주식’ 문제로 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 재벌가에서는 이 문제로 원소유자인 재벌 총수와 명의 제공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빚으면서 자칫 법정다툼으로 비화될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2008년 4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특검 사무실로 들어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경향신문

2008년 4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특검 사무실로 들어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경향신문

최근 재벌가의 차명주식 문제가 불거진 배경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가장 큰 이유는 최근 ‘부(富)의 편법 대물림’이 이슈로 등장하면서 국세청이 기업주 일가족 내부의 주식지분 이동에 대해 대대적인 정밀조사에 나선 때문이다. 여기에 상당수 기업들이 2~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서 과거 임원이나 제3자에게 명의신탁으로 맡겨두었던 회사 주식을 되돌려받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도 또다른 배경이다.

사실 2000년 이전만 해도 상당수 재벌이나 대기업에서 오너들은 자신의 주식을 임원이나 제3자 이름으로 명의신탁해 놓았다. 당시 주식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숨겨둔 이유는 세금을 줄이는 게 목적이었다. 특히 나중에 자녀에게 상속이나 증여를 할 경우 제3자 명의를 통해 넘기면 양도소득세나 증권거래세만 납부하면 된다. 재산의 절반에 달하는 증여세나 상속세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명의 제공자에겐 적당한 사례비로 무마하면 가능했다. 지난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재벌가의 차명주식은 상당부분 실명으로 전환됐지만, 여전히 엄청난 차명주식이 남아 있을 것으로 조사기관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지난 2008년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드러난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삼성SDI의 차명주식 실명전환은 대표적인 실례 중 하나였다. 당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드러난 삼성그룹 차명주식은 삼성생명만 해도 수백만주에 달했다. 회사 임원 이름으로 숨겨진 주식이었다.

지난 2008년에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희씨와 매제인 김기병씨가 대주주로 있는 롯데관광개발(롯데그룹 계열사는 아님)이 제3자에게 차명으로 맡겨둔 190만주에 달하는 회사 주식을 갑자기 자녀들에게 넘겨주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실명전환으로 신정희씨의 장·차남은 어느날 갑자기 1000억원대 주식갑부 대열에 올랐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라 차명주식은 불법이고, 실명으로 전환하는 유예기간도 지났기 때문에 차명주식 사실이 들통날 경우 중과세 대상이 된다. 때문에 명의 제공자가 실명전환을 거부하고 본인 소유를 주장하면 원소유주로선 자칫 회사 주식을 고스란히 날릴 수도 있다. 소송을 걸어봐야 불법행위이니 법정에서도 이길 확률이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삼성그룹 임원들은 꽤 양심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그렇지 못한 사례도 많은 모양이다. 주가가 크게 올라 일확천금을 손에 쥐겠다는 ‘돈욕심’이 앞선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굴지의 재벌가에선 명의를 빌려준 전직 고위임원이 실명전환을 거부해 충돌하고 있고, 또다른 재벌가에선 수십년간 최측근 가신이었던 임원이 좌천인사에 불만을 품고 총수를 상대로 차명주식 등 불법을 폭로하겠다며 협박 중이라는 말도 새어나온다.

수년 전 작고한 남상태 전 대우건설 회장이 “(대우)그룹이 간판을 내린다고 하자 임원들 명의로 있던 회사 소유의 골프회원권이나 계열사 주식 중 상당수가 반환되지 않았다”며 대우 몰락 당시를 회상했던 말이 기억난다.

정선섭<재벌닷컴 대표> chaebul@chae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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