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미국 LA 출장길에서 평소 안면이 있던 유명 재벌 2세와 우연히 만나 장시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장거리 비행에 심심하던 차에 우리는 와인을 몇 잔 걸치며 이런저런 속 깊은 대화도 나눴다. 그 역시 회사 일로 출장을 가던 중이었다.

서울시에 빼곡이 들어선 재벌기업들의 사옥. / 연합뉴스
대화는 주로 필자가 질문하는 편이었고,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쪽이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몇가지 대화를 더듬어 본다. 우선 필자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편한 퍼스트클래스를 놔두고 비서도 없이 불편한 이코노미클래스를 이용하게 된 이유였다.
필자는 “재벌 2세쯤 되면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편하게 출장가는 것 아니냐? 갑작스런 출장에 예약이 안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생각하는 것처럼 돈이 없고, 함부로 쓰지도 못해요” 하며 웃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지난해 배당금도 수십억원이 됐고, 회사의 고위 임원으로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제 지갑 들여다보듯 반문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배당금은 이것저것 공제하고 나면 50~60%에 불과하고, 사내외 혹은 가족들의 경조사나 외부활동을 하다보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보통 월급쟁이나 다를 게 없다며 손을 저었다. 공식행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년에 수십번을 다녀오는 해외 출장도 절반 이상은 이코노미클래스를 이용한다고 덧붙였다.
얘기 주제는 재벌과 중소기업의 상생경영으로 넘어갔다. 필자가 “재벌들도 할 말이 많은 것 같던데…”라고 묻자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재벌이 앞장서 중소기업과 상생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게임이 공정하려면 룰이 공정해야 하는데, 공정한 제도를 마련하기보다는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내놓으라고만 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한국 재벌 2세의 자질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그는 “회사를 창업한 선대와는 확실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며 촌평했다. 그가 지적한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제조업보다는 금융이나 서비스업에 밝고, 둘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이 매우 강하며, 셋째는 사업보다는 재테크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부분 외부접촉이 없이 자라면서 외국에서 공부하다보니 그런 사고를 가지게 된 듯하다”고 분석했다. 그 역시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수년 동안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재벌 2세의 검증 없는 경영권 승계에 대한 질문에 그는 “경제환경과 사회환경이 많이 변해서 재벌 2세라고 무조건 경영을 이어가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어 “회사 내에서 임원들이나 직원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느낌을 받고 있으며, 행동도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무언가 좋은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10시간 동안 재벌 2세와 나눈 대화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겉으론 화려하고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재벌 2세도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고민도 많고, 생각도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LA공항에 내리자마자 다른 비행기로 옮겨타야 한다며 서둘러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당당하고 보기 좋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정선섭<재벌닷컴 대표> chaebul@chaeb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