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후 과다노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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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들을 단속하던 시절이 있었다. 줄자를 든 경찰이 젊은 여성을 멈춰 세우고 치마가 무릎 위 몇 ㎝까지 올라갔는지 단속하는 기이한 일이 도심 한복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가난을 이기고 고도성장을 이뤄내며 이제 막 자유가 움트던 때였지만 노출에는 엄격했다. 통기타와 맥주가 청춘의 낭만을 표상하던 그 시절 언론은 미니스커트를 두고 “스커트 길이는 올라가고 어깨까지 노출시켜 보기에 민망할 정도”라며 개탄했다.

스포츠칸·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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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요즘은 어떠한가. 40년 전에는 노출을 엄격하게 규제하던 시대였다면, 요즘은 마치 노출을 권장하는 것으로 비칠 정도로 노출이 넘쳐난다. 전신 망사스타킹이나 가터벨트를 겉옷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 시대에 살다보니 이젠 여고생들까지도 교복을 줄여 미니스커트로 만들어 입는 세상이 되었다. 여배우들은 스타화보를 통해 늘씬한 각선미를 노출하고, 제작 발표회나 레드카펫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파격적이고 과감한 노출로 섹시미를 발산한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앞모습만이 아니라 등이 깊숙하게 파인 뒤태까지도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기는 전천후 과다노출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실 노출은 사극 드라마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약방의 감초였다. 칭칭 동여맨 한복 옷고름을 풀고 대나무 목욕통에 앉아 속살을 드러낸 여배우의 목욕 장면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는 순간적인 시청률 수직상승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사극과 주인공 여배우의 노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노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저마다 다르다. 보일 듯 말 듯한 숨김의 미학이 있어야 노출이 더 빛을 발하는데 불필요하게 과감한 노출로 이제 웬만한 노출에는 끄덕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외국 배우들의 노출은 연기 투혼이라면서 극찬하면서도 국내 배우의 노출 연기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등 제각각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처럼 노출에 민감해졌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현대인의 조급증에서 찾아보려 한다. 사실 인터넷으로 업무처리 시간이 빨라진 만큼 여가 시간이 더 많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하게 산다. 우리는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증세를 보이고 문자 메시지를 밥먹듯 보낸다. 어디 이뿐인가. 셀카를 찍어서 트위터나 블로그에 올리고 실시간으로 답글도 달아야 한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심지어 화장실에서조차 인터넷을 한다. 바빠도 너무 바빠졌다. 우리는 휴대폰이 없던 10여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함에 과다 노출되어 있다.

방송가에서도 기술의 발전은 조급함을 더욱 부추긴다. 예전에는 배우들이 뚜렷한 이목구비 하나만으로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HD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요즘 배우들은 짙은 화장만으로는 눈밑 세월의 주름을 감출 수 없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은 마음을 더욱 헛헛하게 만들고 의학의 힘을 빌리려는 조급함은 커져만 간다.

10년 이상 한 우물을 파야 연기자로 인정받던 시대는 옛말이 되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별들이 뜨고지는 연예계에서 자기 존재감을 입증하기 위해 노출을 선택한 것이라면 이제는 그런 조급함을 버릴 때도 됐다.

젊음이 아름다운 건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리라. 청춘은 영원하지 않다. 젊음이 보장하는 인기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인기는 다음 세대에게 내주어만 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또 그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이나 영원한 젊음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급함을 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과다한 외적 노출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마음 속을 보고 싶다. 몸의 노출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의 노출을 갈망한다.

<이호석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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