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감귤 - 재일교포 애향심으로 뿌리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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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산물의 재발견

감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60만t씩 먹어 치우는 부동의 소비량 1위 과일이다. 사과와 배는 40만t, 감과 포도는 30만t, 복숭아는 20만t 남짓 한다. 과일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사과를 제치고 감귤이 제일 많이 소비되는 것은 다른 과일이 다 들어가고 없는 겨울에 주로 출하되기 때문이다. 감귤은 생육기간이 매우 길다. 보통 1~3월에 꽃눈이 형성되지만 꽃이 피는 것은 5월 중·하순이고, 그 이후 열매를 맺고 천천히 익어 11월에 들어서야 수확할 수 있다. 제대로 완숙시키려면 12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라봉은 만감류(晩柑類)로 분류되는 만큼 수확 시기가 더 늦어 이듬해 1월에 따내는데 그것도 바로 먹을 수가 없다. 하나하나 비닐 봉지에 싸서 크기별로 분류하고 30일 이상 예조기간을 거쳐야 출하할 수 있다. 겨울 하우스 감귤이 다른 농산물과 달리 초여름에 시장에 나오는 것도 이처럼 긴 생육기간 때문이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캐주얼 과일’로 불리는 감귤은 중국 윈난성과 인도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세계 각지로 전파하는 과정에 알렉산더, 콜럼버스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복자들이 진귀하게 여겨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제주 감귤을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정황으로 봐서 감귤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문종 6년(1052년)의 기록은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 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수인제(垂仁帝)의 명령으로 서기 70년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이고 상세국은 제주도를 가르킨다.

이렇듯 우리가 감귤을 전한 일본에서 1960년대 이후 도리어 묘목을 들여와 제주의 감귤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당시 재일교포의 열정적인 도움이다.

재배 초기 부족한 감귤묘목 기증 받아
1964년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제주도는 수익성이 높은 감귤을 적극 장려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더불어 감귤재배 바람이 불었고, 저리자금 융자와 기반 조성 등 획기적인 지원이 잇따랐다. 문제는 재배 수요를 감당할 만큼 묘목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때 재일교포들의 감귤 묘목 기증 운동이 빛을 발했다. 상당수 재일교포의 고향이 제주도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다시 “종묘법을 개정해서라도 통관 조치하라”고 지시해 감귤산업 진흥의 일대 전기가 마련됐다. 1970년 한 해에 160만 그루를 기증받았고, 정부가 오히려 기증 물량을 제한할 정도였으니 이들의 열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 운동은 1979년까지 이어졌다.

감귤은 겨울철 비타민 C 공급원으로 감기는 물론 암과 비만을 예방한다. 농촌진흥청이 비만한 중학생 20명을 대상으로 감귤 음료 100㎖를 두 달간 꾸준히 마시게 한 결과, 감귤 음료를 먹은 학생이 먹지 않은 학생에 비해 체지방이 3% 감소했다. 특히 운동을 겸하면 체지방 감소율이 7%로 효과가 더 컸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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