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습관을 바꾸자
서민의 음식에서 웰빙푸드로 젊은 여성층도 즐겨

가족 단위 손님들이 한 감자탕 전문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경향신문>
'파리와 함께 뼈다귀에 아슬아슬한 살점 다툰다.’
시인 이재무는 ‘감자탕’이라는 시에서 감자탕 속의 돼지뼈를 남김 없이 먹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손으로 손바닥만한 뼈다귀를 들고 뼈 사이에 붙어 있는 살점을 뜯고, 뼛속 진액을 쪽쪽 빨아 먹는 모습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사실 감자탕은 먹는 모습만 상상해도 군침이 도는 아주 특별한 음식이다. 감자탕이 주는 포만감 때문만은 아니다.
노화 방지 및 골다공증 예방 효과
감자탕에 배어 있는 한국 서민의 문화적 동질감, 즉 ‘한국의 맛’과 ‘넉넉한 인심’은 다른 음식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다.
감자탕의 묘미는 깊은 국물 맛에 있다. 돼지의 신선한 등뼈와 목뼈를 큰 솥에 넣고 불을 조절해가며 서너 시간 동안 삶아낸 뒤 이때 우러난 국물에 양파, 마늘, 생강, 한약재 등으로 육수를 우려낸다. 듬직하던 통뼈도 조개처럼 벌어질 정도로 고와야 제 맛이 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을 감자, 깻잎, 시래기, 묵은 김치, 다진 양념 등으로 마무리한 뒤 다시 한 번 끓인다. 그제야 뼈 골수에서 배어나온 국물과 각종 부재료에서 나온 향기는 시원한 국물의 풍미를 이룬다. 서울 장충동에 있는 ‘말뚜기 뼈다귀 감자탕’ 박갑일 대표는 “감자탕은 결코 만들기 쉬운 음식이 아니지만 국물 문화라는 한국 음식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라면서 “국물 음식은 뜨겁고 걸쭉하지 않으면 그 맛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감자탕의 걸쭉한 풍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은 인심이다. 감자탕은 탑을 쌓은 듯 수북해야 제맛이 난다. 감자탕의 인심도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지금이야 남녀노소 모두 즐기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한 사람들이 기피하던 서민의 음식이었다.

전통식으로 만든 돼지갈비 감자탕.
옛날 감자탕은 개장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어 만든 게 육개장이 됐고, 돼지뼈를 넣은 게 바로 감자탕의 시초였던 셈이다. 하지만 감자탕에 관한 문헌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돼지 사육으로 유명한 전라도 지방에서 소뼈 대신 돼지뼈를 우려내 뼈가 약한 환자나 노약자들에게 먹게 하여 치유·예방한 보양음식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돼지뼈에는 단백질, 칼슘, 비타민 B1 등이 풍부하다. 성장기 어린이 발육에 큰 도움이 되며 노인에겐 노화 방지 및 골다공증 예방 음식으로 효과가 좋다. 최근에는 남성의 스태미나 음식으로,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물론 옛날에는 감자탕에 감자를 쓰지 않았다. 감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불과 150여 년 전이다. 더욱이 감자를 식용으로 재배한 것은 근래 들어서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감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 박갑일 대표는 “돼지 등뼈 사이에 붙어 있는 노란 색깔의 힘줄을 ‘감자’라고 했다”면서 “감자탕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감자탕은 주원료인 ‘감자고기’의 이름을 따 붙인 셈이다.
감자탕에 감자를 넣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 개항기라는 게 통설이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왔다. 당연히 전국 각지는 물론 외국의 다양한 음식이 소개됐다. 또 향토음식과 전혀 다른 변형된 음식도 만들어졌다. 음식 변형에도 시대적 배경이 작용한다. 개항기의 인천, 1899년 경인선 개통 공사 등에 노동자가 많이 동원됐다. 노동자들은 싸고 푸짐한 음식을 찾았다. 가장 싼 재료로 영양도 보충하고 포만감도 느낄 수 있는 돼지뼈, 시래기, 감자 등을 첨가한 탕국(감자탕)이 그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감자탕이 힘들었던 시절, 노동자를 위한 음식, 저잣거리의 서민 대표 음식으로 각인된 것이다. 어느 시인이 ‘감자탕 속의 돼지뼈처럼 슬프고 서럽다’고 표현한 이유이기도 한다.
퓨전레스토랑 요리로 변화
노동자들에겐 질보다 양이 중요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때문에 감자탕에 매운 맛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라는 게 음식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매운 맛이 시원한 맛의 원천이다. 매운 맛이 주는 속시원함은 단지 기분만으로 느끼는 게 아니다. 실제로 다양한 생리작용을 한다. 매운 맛이 통증으로 대뇌에 전달되면 대뇌에서는 이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기분을 좋게 하는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이 엔도르핀이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것이다. 통증의 쾌감인 셈이다.
어떻든 감자탕 하면 허름한 시장 골목에서 중·장년 남성들이 소주 한잔 하며 곁들인 안주로 여겨졌다. 그런 감자탕이 변신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중·장년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난한 노동자의 음식에서 가족 외식음식, 웰빙음식으로 바뀌고 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다. 세계 각국의 외식문화가 유입돼 퓨전 음식이 확산됐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은 인류의 법칙이다. 오히려 전통음식이 인기상품으로 부상하면서 세계화의 기반을 다지는 기회가 된 것이다. 전통음식의 현대화는 한국적인 음식문화와 서구적인 문화가 결합해 순화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감자탕이 선술집의 안줏거리에서 퓨전레스토랑의 요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가족 외식 메뉴로 격상한 것이다. 박갑일 대표는 “최근 젊은 여성 등 신세대들도 많이 찾고 있다”면서 “전통음식이라는 특성 외에도 건강, 가격, 맛이라는 3박자를 고루 갖춘 덕분”이라고 말했다.
가족 외식 메뉴로 인기를 얻은 데는 무엇보다 감자탕의 역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외국살이를 하다보면 김치와 된장 등이 불현듯 먹고 싶어지는 것과 같이 한국의 입맛에는 감자탕의 인이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와 같이 아무런 이유 없이 끌리는 전통음식이기 때문이다.
감자탕은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 연세대 한국어학당 6급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르페르의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 순두부찌개, 삼겹살, 갈비 등과 함께 감자탕을 꼽았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본지 캠페인 ‘식습관을 바꿉시다’와 ‘우리 농산물의 재발견’이 1년간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