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산물의 재발견

지난해 첫 벼 수확을 한 농부가 환하게 웃고 있다. <김문석 기자>
사과의 열매는 ‘사과’라고 부른다. 콩의 씨앗은 ‘콩’이다. 감자의 먹는 부분(덩이줄기)도 그냥 ‘감자’다. 하우스에 심을 때도, 열매를 딸 때도, 시장에서 거래될 때도, 식탁에 올라서도, 오이는 ‘오이’일 뿐이다. 모든 작물이 그렇다. 그렇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유독 이것만은 모를 심어 벼를 기르고 쌀을 탈곡해 밥을 먹는다. 국어사전에서 ‘쌀‘을 찾아보면 벼에서 껍질을 벗겨낸 알갱이라고 하는데, 보리쌀·좁쌀이라는 말도 쓰는 것을 보면 조금 더 넓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냥 ‘rice’일 뿐인 이 작물을 우리는 왜 이리 유난스레 대할까.
쌀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농산물이지만 우리를 비롯한 몇몇 아시아 나라에선 ‘하늘’이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돌아 북한에 보내고 술과 떡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사료용으로 쓰자는 주장이 나오지만, 어르신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 그 시절 쌀이 무엇이었는지.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됐다가 8년 만인 1986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명감독 신상옥의 전성기는 단연 1960년대 초반이다.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 <열녀문>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을 모두 이 시기에 만들었다. 그의 1963년 연출작 중에 <쌀>이라는 작품이 있다.
벼농사를 짓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줄거리는 이렇다. 전북 무주 구천동의 가난한 농민들은 당시 쌀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워낙 깊은 산골이어서 겨우 부쳐 먹을 밭 몇 뙈기뿐이다. 논이 없었다. 이들은 논을 일구기 위해 힘을 모은다. 물줄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맨손으로 산을 뚫기 시작한다. 아무런 장비도, 돈도 없다. 그저 마음만으로 뚫는다. 하지만 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공사는 수없이 중단되고 농민들은 쓰러진다. 그래도 벼농사 한번 지어보겠다며 그 무모한 ‘짓거리’를 그만두지 못한다. 마침내 산을 뚫고 수로를 만들어 그토록 바라던 벼농사를 일군다.
신 감독은 자막에서 “대한민국 어디서나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국민들이 이렇게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영화로 그는 제12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이모우가 감독하고, 공리가 출연한 영화 <홍등>은 중국 최고의 이야기꾼 쑤퉁(蘇童)이 지은 <
처첩성군(妻妾成群)>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정작 쑤퉁에게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바로 <쌀>이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홍수가 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주인공 우룽이 쌀집에 일꾼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밥만 먹여달라. 잠은 서서 자도 좋다”는 우룽의 말이 당시 중국 민초들의 삶을 대변한다.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출판사를 경영하던 한승오는 마흔이 넘어 충남 홍성군 홍동면 구정리 고요마을에서 한 비어 있는 농가를 발견한다. 그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농사 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녹록히 지냈을 리 없다. 그 고단함으로 지은 책이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와 “몸살”로 이어지는 농사일기다. 모를 심으면 그 땅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겪는다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벼가 햅쌀이 되기까지”라는 잊을 수 없는 글을 남겼다. 일생을 논에서만 살아온 벼가 탯줄을 끊은 아이처럼 시골 아스팔트 시커먼 망에 뉘어져 겪는 이야기다. 햇살과 바람과 사람 발자국과 낙엽을 겪으며 길 위의 벼는 온전히 가을을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거듭난 햅쌀은 깊은 가을 맛을 낸다. 이 글을 읽은 소설가 성석제는 “단 며칠, 벼에서 쌀이 되는 사나흘의 시간 속에 이만한 역사가 있다”며 “어떤 존재든 길고 고단한 여정을 거친 뒤에는 깊은 맛을 품게 된다”고 썼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본지 캠페인 ‘식습관을 바꿉시다’와 ‘우리 농산물의 재발견’이 1년간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