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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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눈]“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설사 누가 나를 ‘좌파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폄훼할지라도, 나는 의식적으로 왼편에 서서 나의 존재에 대한 ‘배신’을 계속하고자 한다.

나는 지역주의의 수혜지역인 경상도 지방에서 남성으로 자라나서, 입시경쟁의 승자가 되어 대학에 들어간 후 ‘미국 물’까지 먹고 돌아왔으며, 집값 비싼 강남 지역에 거주하면서 ‘학벌’의 정점이라는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정식,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에 따르면, 나는 지금 ‘숭미(崇美)보수우파’로 활약하고 있어야 할 게다.

그런데 나는 사회적으로 반대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나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사회 운영 원리를 대폭 받아들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벗들은 ‘생래(生來)적 진보’가 아닌 자가 ‘의지(意志)적 진보’를 견지·지향한다고 종종 나를 놀리기도 하는데, 이 글을 빌려 응답할까 한다. 일찍이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경쟁과 투쟁의 본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침팬지의 탐욕 유전자 외에도 보노보(bonobo)의 공감 유전자도 새겨져 있다. 매트 리들리는 자신의 책 <이타적 유전자>에서 이타심이 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지 등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해낸 바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측은지심’과 ‘이타적 유전자’가 작동할 틈을 주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말한 ‘승자독식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규모 부자 감세, 금산분리 완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하여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다행히 세계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고 있다. 예컨대 미국 오바마 정부는 ‘부자 증세, 빈자 감세’를 통해 국민복지 확대와 부의 재분배를 추진하고 있으며, 금융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고삐를 죄고 있다. 대표적 신자유주의자였던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조차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 이윤 분배, 단기 실업자에 대한 실업급여 인상, 가족수당 및 보육수당 인상, 저소득 노동자 소득세 감면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오래전 공자는 위정자를 향하여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즉 “(백성들이) 적게 가진 것을 걱정하기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 ‘고르지 못함’은 단지 개인의 선의나 자선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며, 법적·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 나라의 성장동력을 키우면서도 동시에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농민 등을 껴안는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약육강식의 비정한 정글이 되고 말 것이다. 얼마 전 친한 벗의 추천으로 지난해 6월 <해리포터>의 저자 J. K. 롤링이 미국 하버드대에서 행한 연설을 접했다. 롤링은 하버드 졸업생들에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의 힘을 기초로 세상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졸업생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것, 힘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 자신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간직할 것”등을 요청했다. 나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이 과잉우편향 사회에서―변광배 교수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을 번역하며 멋지게 의역한 책제목을 빌리면―”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설사 누가 나를 ‘좌파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폄훼할지라도, 나는 의식적으로 왼편에 서서 나의 존재에 대한 ‘배신’을 계속하고자 한다. 그럴 때 우리 사회도 겨우 ‘시중(時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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