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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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완성해 가는 지도자가 좋아”
음지를 양지로 바꾸는 대통령 이미지 메이커

[유인경이 만난 사람]김한길 의원

김한길의원은 약간 수척하고 말라 보였다. 지난달 27일,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위원장 경선에서 유인태의원에게 패배해서 상심한 것 같아 은근히 안쓰러웠다. “살이 좀 빠진 것 같다”고 묻자 그는 이런 측은지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담담하게 “다이어트를 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체중이 80㎏까지 나가서 다이어트를 했단다. 그저 식사량을 줄였더니 살이 빠지더란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온국민 초미의 관심사인 신행정도시와 관련된 국회 건설교통위원장과 신행정수도 후속대책특별위원장 등을 겸임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차지하고도 정작 경선에선 역전패를 당했고, 물러난 강동석 건설교통부장관 후임 하마평에도 오르내리는데 그는 선거나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양 천진난만한 얼굴로 “안 먹으니까 진짜 체중이 줄더라구요”라고 말한다. 그 어떤 큰일이 닥쳐도 그는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일이 많을수록 더 얼굴이 반짝거린다.

“얼마 전에 공주·연기를 다녀왔는데 그곳 사람들도 별로 기대를 안 하던데요. 위헌판결도 나왔었고 또 40조가 넘는 돈을 들여 겨우 40만명의 인구를 분산하자고 수도를 옮겨야 하나요? 통일 후를 생각하면 위치가 너무 아래라는 지적도 있고….”

최근 그가 가장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행정중심 복합도시에 관련된 ‘딴지’를 걸자 그는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듯 자상하지만, 약간 한심하다는 듯한 어투로 설명을 해주었다.

“행정도시는 공주·연기나 충청도민들에게 선물을 주려는 선심 정책이 아닙니다. 중부지역을 활성화시키려는 것이지요. 서울은 이미 너무 늙었고 경쟁력 역시 포화상태라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겁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에도 이미 아주 꼼꼼하고 치밀한 수도이전 문건이 작성되었고 전두환대통령 역시 계룡대 근처에 700만평 정도의 땅을 매입하기도 했어요. 수도권 집중화가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하는 이야기지요.

50조가 넘는 비용을 걱정하지만 그 돈을 안 쓴다고 해서 중소기업 지원하고 극빈자를 구제해줄 것도 아닙니다. 40만~50만명의 인구를 어느 곳에선가 소화해야 하는데 서울 인근에 그런 도시를 만든다면 땅값이 더 비싸니 67조 이상의 비용이 듭니다. 또 통일, 통일하는데 통일을 원치 않는 이들이 꼭 그런 지적을 하더군요. 만약 통일이 되면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를 통한 다음에 서울이나 평양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통일수도를 만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합의해 논의할 일이지요. 올해 안에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청사진이 발표되면 서울시민들의 상실감도 회복되고 피폐해진 지방을 살리려는 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믿는 구석 없어도 승승장구

‘여권의 대표적 전략통’으로 평가받고 국회, 청와대, 장관직을 경험한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지만 정작 정치인으로는 가장 열악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그 흔한 지역 연고가 없다. 부모님 고향은 함경북도고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 일곱살 때 서울로 왔다. 지역감정이 끈끈한 경상·전라·충청 등 단 한곳과도 인연이 없다. 학맥도 없다. 소위 일류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고등학교마저 남녀공학이라 팍팍 밀어줄 남자동창도 드물다. 언젠가 명문대 출신이 아닌 것을 한탄하는 노무현대통령에게 “제가 동창생 많고 실력있는 부산상고만 나왔어도 소원이 없겠습니다. 제가 나온 이화여대부고는 남자동창이 40명 정도인데 다들 외국 가서 동창회에는 10명도 안 모입니다”라고 하소연도 했다.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언론계나 법조계 출신 등 직역군이 따로 있는데 그는 혼자서 글쓴 소설가 출신이다. 동교동계, 상도동계 등 계파도 없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꽃미남처럼 잘 생겼거나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것도 아니고 유시민의원이나 노회찬의원처럼 언어의 마술사로 평가받거나 홍준표의원 등 다른 당을 공격하는 저격수란 평을 듣지도 않는다. 특징이라곤 하얀머리에 어눌한 말투뿐인데도 그는 정치계에 입문한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가 첫부인과 이혼 후 미국에서 돌아와 날 찾아왔을 때 그의 수중엔 달랑 50달러 뿐이었다. 곧 방송국 시사프로 작가로 일을 시작하더니 얼마후 방송위원회 최연소 사무총장이란 자리에 올라갔고 ‘여자의 남자’란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더니 국민당 부대변인이 되고 TV 토크프로 진행자로 변신하더니 청와대 들어가 기획수석이 되고, 또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고 다시 국회의원이 되고… 하도 볼 때마다 출세를 해서 이젠 그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설복시키고 감동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고 한명회처럼 지략도 뛰어나다.”

그를 20여년간 지켜본 가수 조영남씨의 증언이다. 감성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 토크프로그램의 사회자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가 엄청나게 높은 영감님들(?)을 사로잡는 기술은 정말 경이롭기만 하다.

강원룡 목사도, 정주영 회장도, 김대중 대통령도 모두 그 앞에선 ‘꺾어지고’ ‘흐물흐물’ 해져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처음 정치계에 입문한 것은 정주영 전 현대회장이 이끌던 국민당 부대변인으로서였다. 직함은 부대변인이었어도 정회장의 얼굴도 한번 못본 그가 정회장 출장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이른바 공산당 발언 파문과 관련된 성명서를 냈는데 그후 정회장에게 불려가 설명을 했다. “결론만 짧게 말해!”가 트레이드마크인 정회장은 그의 말을 2시간 동안 경청했고 하룻밤만에 공사를 마쳐 다음날 아침에 정회장 옆방에 그를 위한 ‘특보실’이 마련되었다. YS의 입당제안을 거절하고 DJ를 선택한 후 그는 15대 대선 당시 DJ의 이미지메이킹을 총지휘하며 지독한 편애를 받았다. DJ는 그에게 두번이나 전국구 공천을 줬고 청와대 기획수석, 문화부장관을 맡겼으며 다른 이들이 다 말리는데도 그의 말만 믿고 2002년 월드컵 예선 경기를 보러 일본으로 떠나기도 했다. 16대 대선 때도 기획특보 겸 미디어 선거본부장을 맡아 노무현대통령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신기한 것은 높은 분들이 그를 잘 봐주고 인정해준 것이 아니라 처음에 그가 선택했을 때는 음지였어도 금방 양지가 된다는 것이다. 줄반장도 못해본 학생이 전교회장 선거에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는데 왜 더 친분있는 정몽준후보가 아닌 노무현 후보를 도왔는지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캠프에 합류했을 때 지지도가 14%, 정후보의 지지도는 34%였어요. 제가 단일화하라고 제안했고 1차부터 3차까지 협상팀으로 유일하게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우여곡절끝에 마지막 TV 토론을 하는 날인데 몇날을 잠도 못자고 토론자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수행비서가 방송 직전에 누가 줬다면서 질문 몇개를 제게 전해주더군요. 직접 드리라고 했더니 ‘몰래 빼낸 걸 알면 절대 안 보실 분이니 예상질문이라고 하면서 보여드리고 준비를 시켜드리라’고 해요. 수년간 곁을 지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걸 보면 그동안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봤을까 짐작이 가고 ‘바보 노무현’이란 말이 떠올라 가슴이 뜨뜻해지더군요. 제가 선거의 달인, 이미지메이커라고 하는데 현란한 말 몇마디, 넥타이나 헤어스타일 등의 잔재주만으로는 대국민 사기극밖에 안됩니다. 제대로 시대의 흐름, 민심을 읽고 후보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는 전략을 짜고 노력을 했기에 좋은 성과가 있었던 거죠.”

[유인경이 만난 사람]김한길 의원

잘 나가는 아내 덕에 먹고 살아

기성 정치인들의 대국민 교감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정치에 투신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실력을 발휘했다.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낼때는 ‘조센징’으로 놀림당하고 일본말이 섞인 어투 때문에 귀국해서는 ‘쪽발이’라고 비난을 받았으며 진보정치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아버지(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 때문에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미국에 가서도 낮에는 햄버거를 굽고 심야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갖은 잡일을 경험했다. 국회의원 선거에도 2번이나 떨어졌다. 그의 어머니가 ‘건달’이라고 그의 다양한 경력을 표현하지만 그런 건달정신, 즉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무슨 이야기건 누구에게나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저력을 키운 덕분에 그는 엄숙주의와 위선으로 포장된 기성정치계를 가볍게 비웃으면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요즘 행정도시와 더불어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정치 이슈는 ‘고위공직자 재산형성 과정 공개, 고위공직자 부동산 매매 금지’다. 그는 지난달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고위공직자는 임명되거나 선출된 직후 재산을 신고할 때 취득경위와 소득원은 어떤 것인지를 본인이 자료를 통해 밝혀야 한다. 정부 공직자윤리위는 이를 검증해야 하며 이를 위반했을 경우 패널티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15대 때부터 제안한 것이고 노대통령의 대선공약이자 우리당의 총선 공약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신고한 재산은 18억. 그 가운데 그의 재산은 달랑 1억이고 아내 최명길씨가 17억원이다. ‘여자의 남자’란 소설만 250만부가 팔려 인세도 엄청나고 방송 출연료도 쏠쏠했을 텐데 왜 재산이 1억밖에 없는지, 부인 명의로 돌려놓은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는 그동안 선거다 뭐다 해서 돈을 많이 썼으며 재산공개 자료를 보고서야 재산이 많은 것에 놀라 아내에게 ‘돈 좀 풀라’고 했다고 변명했다. 만삭의 몸으로 ‘용의 눈물’에 출연해 최고액의 출연료도 받았고 여전히 CF 촬영 등으로 돈을 잘 버는 아내 최명길씨는 17대 총선 때는 지역구에서 맹활약을 했다. 예쁘지, 돈 잘벌지, 아들도 둘이나 낳았지 선거운동도 잘해줬지 정말 그는 아내 복도 많다.

“오래 연애도 못하고 스포츠지에 나오는 바람에 서둘러 결혼했죠. 결혼할 무렵엔 그저 70점쯤 되는 아내라고 생각했는데 살수록 괜찮은 사람이에요. 지금은 90점을 주고싶어요. 아이들도 잘 키우고 저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정말 항상 고맙죠.”

아내에 대한 논평만은 기성 정치인 같았지만 거짓은 아닌 듯했다. 또 서울시장에 출마한다, 대권도 노린단다 등의 소문이 있어 물어보니 그는 갑자기 존경하는 인물 이야기를 꺼냈다.

“역사인물 중 전봉준을 제일 좋아해요. 동학혁명 당시에 마을에 글씨를 쓸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란 이유로 본인은 너무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떠밀려 서당훈장에서 지도자가 된 분이죠. 타의에 의해 만들어졌어도 마지막까지 가장 지도자적인 면모를 보였고 일본에 문초를 당하면서도 정말 의연했지요. 내가 잘 났으니 날 뽑아달라고 하는 어색한 선거를 통한 정치인이 아니라 전봉준처럼 잘 완성되는 지도자를 좋아해요.”

인터뷰를 하는 2시간 동안 그는 30분 간격으로 “과자는 없나?” “주스를 마셨으니 이젠 커피를 가져오지” 등 주문을 거듭해 다양한 음료와 과자, 딸기까지 대접했다. 요즘처럼 형편이 어려운 국회에서 이런 융숭한 대접은 처음이다. 인터뷰 담당자가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파악했음에 틀림없다. 진정한 정치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처럼 민심(?)을 파악해 섬세한 배려를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아닐까.

<글/유인경편집장 alice@kyunghyang.com >

<사진/김석구기자 sg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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