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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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능력 수용해야 부부평등”
‘호주제 폐지’ 주역으로 우리시대 진정한 양성평등 안내자

[유인경이만난사람]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지난 2일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던 날, 텔레비전에 비친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59)을 보고 한 아저씨는 이렇게 통탄했단다.

지난 50년 동안 여성계의 숙원이던 호주제 폐지는 숱한 여성운동가들이 힘을 모았고 국회의원들이 발의해 국회에서 통과되어 결정되었지만 대중들에게 ‘호주제 폐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곽배희소장이란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드물 것 같다.

그는 남들이 걱정해줄 만큼 ‘비쩍 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지난 30년 동안 호주제 폐지에 관련한 법안을 연구하고 신문·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전국을 누비며 호주제폐지의 당위성을 강연하고 또 국회의원들을 만나 설득하고 서명을 받으면서 호주제 폐지를 위해 땀과 눈물을 흘렸다. 덕분에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감격스러움’ ‘여성들을 짓누르던 걸림돌을 50년 만에야 치웠다’ 등으로 표현되는 호주제 폐지를 이끌었고 이제 양성평등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던 날, 호주제폐지에 앞장섰던 여성계 인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만세삼창도 하고 또 축하연도 이어졌지만 정작 곽소장은 담담했다. 너무 오래 공부하고 시험을 치른 후의 허탈감도 있고 걱정도 컸기 때문이다.

“온나라가 콩가루 집안이 되고 우리 민족이 개·돼지와 다름없이 되는 꼴을 못보겠다” “호주제 없어지면 우리는 짐승된다”며 삭발까지 하는 등 극렬하게 반대하던 ‘정통가족제도수호 범국민 연합’과 성균관 등은 물론 졸지에 ‘가장’이란 자리를 빼앗기게 됐다고 오해하는 보통남성들의 상실감도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호주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남성들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도 아니고 족보, 제사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동안 호주제로 상징되던 가부장적 사회의 악습이 사라질 뿐이죠.
이제 여성들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버릴 수 있어요. 내가 낳고 기른 아이인데 이혼하면 동거인으로 등록하던 슬픔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새아버지의 성과 달라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고통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또 남편이 외도를 해서 낳은 아이가 내 자식으로 호적에 올라 있는 억장무너지는 상황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됩니다.

남성들도 이젠 혼자 온집안과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호주나 가장의 무게감과 짐을 벗고 편안해질 겁니다. 또 그동안 재혼, 한부모 가정 등 비정상으로 분류되던 가정이 모두 정상가정이 되니까 그로 인한 고통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법과 제도가 생기면 익숙해지기까지 불편과 불안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확실한 것은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행복한 우리 가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호주제를 폐지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가정이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친다는 겁니다.”

외유내강한 완벽주의자

호주제폐지법안이 통과되고 이틀 만에 전북 정읍의 서모씨가 어머니 성씨(姓氏)를 따를 수 있게 한 민법 개정법률안 제781조 1항에 대한 위헌확인 헌법소헌을 제기했다.

그는 “여성의 입김이 강해져 남자들은 텔레비전 채널권조차 없는데 호주제까지 폐지되어 자녀 성까지 어머니의 성을 따르라면 가정불화는 물론 온나라가 흔들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일각에서는 “이혼·재혼녀와 그 자녀 등 일부에서 겪는 문제 때문에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수백억원을 들여서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를 만들어야 하냐”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이들도 있다. 곽소장은 특유의 나지막하고 굴곡없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과도기적 상황이니까 당연히 혼란을 느낄겁니다. 하지만 세계 2위의 이혼공화국에다 재혼도 급증하는 등 시대가 급속도로 변하는데 그 때문에 갈등을 겪는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개인의 존엄성을 살리는 것이 1인1적제입니다. 전산화를 하려면 호주제를 유지해도 그와 비슷한 돈은 들어가고 그동안 엉뚱한 곳에 빠져들어간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생각하면 절대 예산낭비가 아닙니다.”

곽소장이 하도 호주제 폐지를 외치니까 어떤 이는 그가 아버지나 오빠들에게 굉장히 구박받고 자란 ‘후남이’거나 폭력남편 등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어 한이 맺힌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정작 그는 그런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그의 맹렬한 활동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고 잘생기고 똑똑한 남자와 결혼해 여전히 잘 살며 든든한 아들까지 있다.

1남5녀중 넷째지만 딸이란 이유로 부모나 형제에게 전혀 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그는 이화여대 법학과 4년 동안 A학점을 받을 만큼 지독한 공부벌레였고 학생운동에 나선 친구들을 “자기만 능력있으면 되지 뭐하러 나설까”라고 생각하며 집에서 책읽고 음악만 들었다. 소외된 사람을 돕고 싶어 법대에 들어갔지만 졸업 후엔 기독교 방송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다 대학은사인 이태영박사의 권유로 상담소와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고 왜 이런 곳에 찾아올까”라고 의아해 하던 개인주의자였단다.

“제가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정말 사람이 된 것은 두 사람을 만난 덕분입니다. 한 분은 이태영선생이죠. 그분을 만나 여성문제는 물론 한국사회 문제에 눈뜨고 평생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야말로 번개나 벼락을 맞은 충격이었지요. 그분의 열정과 헌신을 곁에서 지켜보고 상담소를 찾아오는 여성들의 절절한 사연을 들으며 저도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제 남편이죠.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통해 철도 들도 인격적으로도 성숙했습니다.”

여성운동가나 여류명사의 가정 생활, 특히 남편과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 가정에서도 띠 두르고 “여성인권 보장하라!”를 외치는지, 완벽히 평등하게 가사를 나누는지, 그렇게 시위현장에선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지르는 이들이 남편에게 애교는 떠는지 등등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본다.

곽소장이 서른살에 결혼한 남편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연합통신 사장을 지낸 언론인 김종철씨. 결혼 당시 동아투위를 주도해 투옥되기도 했다. 종손에다 사회운동가인 남편은 그이에게 순종적인 아내상을 요구하지 않고 사회활동도 다 이해했지만 가사나 육아 역시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종가 며느리로 각종 제사를 도맡고 아내, 엄마, 직장인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마음이 편한 결벽증에 완벽주의자인 아내와 하룻밤에도 저녁약속이 3, 4건인 정력적인 사회운동가 남편은 숱하게 싸우면서 내공을 키웠다. 겉으론 부드러워 보여도 집요한 면이 있고 강건해 보여도 마냥 부드러운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몇몇 가족이 어울려 휴가를 같이 가면 다른 부인들이 제게 막 항의를 해요. 남편이 워낙 가사에 비협조적인 데다 일을 시키면 더 망쳐놓기 때문에 뭐든지 제가 해주는 편이거든요. 그러니 다른 남편들이 ‘봐라, 여성운동을 하면서도 저렇게 남편과 자식을 극진히 모시지 않냐’며 부인들을 나무란대요. 남편에게 잘해주는 게 아니라 제가 편해서 그런 건데….”

그러나 남편은 자신이 못해주는 일은 수리공 등 전문가를 불러 해결토록 했고 곽소장의 사회활동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양성평등이란 가사를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제 남성들을 위해 일하겠다

호주제 폐지는 곽소장에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젠 남성중심에서 양성평등으로 가는 길을 닦았을 뿐이므로 진정한 평등이 실현되도록 가족, 법 관계를 세밀하게 손보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부부재산제를 비롯, 이혼 급증으로 인한 자녀복리문제, 결혼은 하지 않고 아이만 낳아 키우려는 비혼모의 법적 권리찾기 등 할 일은 태산이다.

가정법률상담소의 고유 기능과 목적이 법률구조이므로 가정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해주는 더욱 다양한 방안도 모색하고 각종 상담, 세미나 등을 통해 가족이나 가정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교육사업도 강화하고 있다. 이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이들의 구성체가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만든 울타리’로 변해가므로 그들을 위한 새로운 보호제도가 필요하단다. 또 통일을 대비해 북한과 남한에서의 중혼, 상속문제 등 정치적 차원이 아닌 가족적 차원에서의 이산가족 상담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제일 신경쓰이는 것은 남성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성들에 비해 의식변화와 학습진도가 늦은 남성들이 겪는 남성들의 당혹스러움과 고통을 치유하는 문제를 고민중이다. 최근 가장 자주 하는 말도 ‘요즘 남자들 불쌍하다’이다.

[유인경이만난사람]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40~50대 이상의 남성들은 그동안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보호를 받고 자라 아무런 면역성이 없어요. 그동안 억압받고 눌려왔던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복수나 억압으로 여기니 더욱 분하고 억울할 겁니다. 법 제도까지 양성평등이 되었으니 아마 더 힘들고 혼란스럽겠지만 그러면서도 왜 내가 바뀌어야 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아내나 사회만 원망하는 이가 많아요. 호주제폐지나 아내의 이혼요구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회 변화를 겪어도 남성과 여성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고요.”

곽소장은 남성들에게 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결혼 전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으면 “당신 같은 남자랑 안 살아” 하며 날아드는 아내의 이혼장이 줄어들 거란다.

30여년의 이혼상담을 바탕으로 2002년에는 이대에서 이혼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곽소장은 최근에는 여성들의 이혼요구가 60~70%에 이르고, 또 고부갈등만큼이나 심해지는 사위와 장모(처가)의 갈등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서 여성부는 물론 정부가 나서서 남성들의 기를 살리기 위한 프로그램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상담소에도 ‘이혼을 당하지 않으려는’ 남편들의 상담이 급증하고 있어요. 직장생활에 충실하느라 자신과 가정을 방치한 남편을 더이상 못참겠다며 가출한 아내, 바람피우고도 오히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이혼도 못하겠다고 억울해하는 남편들이지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가정과 아내에 무관심했는지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아내와 사회를 원망하죠. 하지만 이렇게 상담소라도 찾아오는 이들은 나은 편이죠. 대부분의 중년남성들은 자신의 가정사나 개인문제를 남에게 털어놓을 엄두조차 못 내고 혼자 끙끙 앓거든요. 그런 이들에게 적극적인 상담과 조정이 필요해요. 우리 같은 기관만이 아니라 여성부 등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곽소장은 “여성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다행스럽지만 여성들 역시 타파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남성들의 악습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그런 책임과 비난을 여성운동하는 이들이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소장이지만 지금도 매일 상담을 하는 상담중독자인 그는 옛 가정법률상담소 백인회관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신축공사 일로 바쁘다. 상담도 하고 몸으로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느라 그 비쩍 마른 몸에는 살이 붙을 틈이 없다.

<글/유인경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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