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벤처 실패는 귀중한 국가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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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기업가에게 ‘패자부활전‘ 기회를 강조하는 벤처스타 1세대

[유인경이 만난 사람]“정직한 벤처 실패는 귀중한 국가자원“

5, 6년 전 벤처 열풍, 아니 벤처 광풍이 불 때 연구소에서 얌전하게 연구만 하던 20~30대의 석-박사들이 ‘벤처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계획서만 잘 써내면 정부에서 알토란 같은 지원금이 척척 나왔다. 사업설명회를 열면 ‘그저 내 돈을 받아만 달라‘고 거액이 든 통장을 무작정 맡기는 이도 있었고 코스닥에선 뻥튀기처럼 주가가 팍팍 튀었으며 매스컴에서는 ‘벤처 스타‘들을 할리우드 스타들보다 더 자주 소개했다.

빛나는 아이디어와 젊은 혈기, 그리고 돈까지 마련한 벤처인들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로켓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가 줄줄이 추락했다. 벤처의 경우 성공률이 5% 미만이니 망한 이가 많은 것은 당연지사. 석-박사라는 화려한 경력이나 벤처사장이라는 근사한 타이틀 대신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은행거래 하나 할 수 없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까지 피해를 줘서 대인관계조차 어렵다.

청년 백수가 아니라 청년 폐인이 된 그들, 실패자-낙오자란 도장이 찍혀 숨조차 제대로 못쉬는 그들만 그 잘못을 다 껴안고 살아가야 할까. 다시 영광의 월계관은 못 쓰더라도 정상 생활조차 불가능할까. 그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벤처 1세대 주역인 전하진씨(47-인케코퍼레이션 대표)다.

“아이템 선정이건 경영방법이건 원인이 있겠지만 정말 너무 많은 사람이 실패를 했습니다. 투자자들은 돈을 잃었지만 벤처기업가는 돈은 물론 인생까지 잃었습니다. 회사가 망하면 빚 등 모든 책임은 사장이 고스란히 껴안을 수밖에 없고 우리 사회에선 재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수백억원의 자금으로 야심찬 사업을 하던 벤처 사장이 이젠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카드 하나 쓸 수 없고 처가, 친가, 친구들의 돈까지 끌어쓰다가 죄책감에 자살한 이도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욕심에 눈멀어 설치다가 망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1만명의 벤처기업가가 쓰러졌다면 그런 경험치들을 그저 쓰레기로 버리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경험은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소중한 학습이고 귀중한 국가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그저 묻어두고 감추려고만 한다면 그들의 쓰라린 경험을 또 누군가 어디에선가 답습하고 또다른 실패와 경제적 피해를 만들테니까요.

위대한 경영자는 유명대학의 MBA코스를 통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회사를 운영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경험과 지혜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업 과정이 정직한 벤처인이라면 우리 사회도 그들을 용납하고 끌어안아 재기의 기회를 줘야 실패란 계단을 밟고 성공의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한민족글로벌벤처네트워크인 인케(INKE)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우리나라 벤처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인하대 산업공학과 77학번으로 지오월드를 경영했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을 맡아 국민주 운동을 펼치며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려갈 뻔한 회사를 살려내 영웅 대접을 받았다. 초대형 사이버생태계를 만드는 예카 프로젝트를 계기로 인터넷 벤처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수만명의 벤처게릴라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외모 또한 준수해서 자동차 광고 모델로 나서는 등 벤처인들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네티앙 사장으로 옮겨가며 무리한 운영 등으로 자신 역시 성공의 달콤함과 실패의 통렬한 아픔을 맛봤다. 빛이 너무 밝았기에 그림자도 짙었고 2년 정도 침잠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자신처럼 실패를 해본 후배 벤처인들을 위한 대부가 되겠다고 나섰다.
“벤처기업협회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실패한 벤처인의 경험을 자산화할 방법이 없을까,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더니 내가 실벤협(실패한 벤처인들 위한 협의회)을 만든다고 기사가 났더군요. 아직 협회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인케나 벤처협의회 등을 통해서 그들을 도울 길을 찾고 있습니다.“

21세기는 패자 게임의 시대

하루에도 수십권씩 성공학 관련 책이 쏟아지고 신문마다 성공한 이들의 인터뷰가 매일 소개된다. 성공한 이는 물론 훌륭하고 축복받은 이들이다. 배울 점도 많다. 국영수 과목을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명문대학 가듯 열정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한다는 기본공식 또한 다 안다. 그래도 성공은 힘들다. 아무나 이건희회장처럼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박세리처럼 엄격한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낼 체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누구나 장동건처럼 잘 생기기도 힘들다.
우리는 오히려 남들의 실수와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운다. 반면교사라고나 할까. 기업에서는 물론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동료의 애교나 명랑한 성격 등은 흉내내기 어려워도 유난히 근무태도가 불량하거나 빈정대는 말투 등으로 미움을 받는 이들을 보면 “난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집을 날린 친구를 보며 보증에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숫자 하나를 잘못 써서 손해를 끼친 동료의 잘못을 보며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숫자에 유념하게 되는 것도 실패가 준 교훈이다.

신약이나 신물질을 개발하려면 평균 1만2000번의 실패를 거쳐야 한다. 석유탐사 때도 최소한 25번은 실패해야 비로소 하나의 유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실패란 더 큰 성공을 위한 신(神)의 선물이다. 이건희회장은 실패학 강의에서 “21세기는 패자 게임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정보확산 속도가 빠르고 경쟁이 극심할 때는 누가 좋은 기회를 잡느냐보다 누가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느냐가 생존의 요건이 된다는 것. 이회장은 또 실패를 ‘고효율의 과실‘로 정의하고 “성공사례학습은 정해진 틀에 따라 문제를 푸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적용능력이 떨어지는 데 반해 실패학습은 망하지 않는 법뿐 아니라 성공하는 법까지를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재기의 동인(動因)이 된다“고 강조했다.

전사장에게 자신의 실패를 분석해보라니까 전혀 자존심 상한 표정이 아니라 착한 학생처럼 순순히 답한다. 그는 첫째 초기의 경험치들이 부족했으며 회사 경영은 한 사이클이 흘러가봐야 아는데 단계별로 필요한 자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1만원이 필요한데 마련된 자금은 5000원뿐이라면 결국 대전에 가서 멈추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5000원을 구하지 못하면 대전까지 오는 데 쓴 비용 5000원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 그리고 전망이 없는 신규사업 역시 재빨리 중단할 시점을 놓치면 자꾸 시간을 끌다 운용비가 늘어나 부채규모만 커진다.

“성공하기보다 망하기가 더 어려워요. 문을 닫고 싶어도 뭔가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고 빚이 있을 경우 회사문을 닫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경제활동이 안되니까 다른 빚을 끌어들여 자꾸 늦추게 되죠. 일부 부도덕한 벤처인들이 사전에 돈을 빼돌리긴 했지만 숱한 벤처인들이 자기 집 팔고 처가도 끌어들이고 친구돈 빌려 연명하다가 빚만 눈덩이처럼 커지니 도망하거나 죽거나 할 수밖에 없었죠. 망하고 싶을 때 제대로 망하게 하는 것도 개인이나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몇년 전에 우리는 ‘은행에서 1000억원만 빌리면 그날부터 발 뻗고 잔다‘는 농담을 했죠. 그렇게 큰 규모면 은행이나 정부에서 알아서 처리해주고 공적 자금을 퍼부어주잖아요. 개인이 시작한 벤처는 모두 혼자 책임져야 하니 피가 마르죠.

물론 대부분 벤처창업자들이 엔지니어나 연구원이라 경영에 문외한인 것도 실패의 이유였죠. 주방장이 설렁탕 잘 끓여 식당이 잘 된다고 무리하게 2호점, 3호점 내면 다른 식당 운영 신경쓰느라 음식맛 떨어지고 손님도 줄어 줄줄이 망해요. 후배들에게 항상 가족과 개인의 돈을 챙길 것, 회사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말 것 등을 당부합니다.“


대박의 꿈은 키워야 한다

이젠 정부에서도 심사를 통해 시장에서 퇴출된 벤처기업인들의 신용회복 및 재창업을 지원한다는 패자부활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다. 또 코스닥 활성화, M&A 활성화 등 벤처활성화 대책을 내놓아 벤처의 봄을 예고하고 있다.

전하진사장도 2년 남짓한 침묵을 깨고 지난 1월에 컴백, ‘벤처여, 다시 한번!‘을 외친다. 그는 벤처기업협회와 회원사들이 공동출자한 (주)인케코퍼레이션의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다. 이 회사는 벤처기업들의 해외파트너 선정, 투자자 유치, 마케팅 대행 등 글로벌 비즈니스 교두보를 제공하는 벤처종합상사다. 자신을 비롯, 동료 벤처인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성만 가진 벤처를 준비된 벤처로 만들어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단다. 벤처스타로 영웅신화를 쓰기도 했고 처참하게 침몰해 손가락질도 받았던 그는 벤처 실패의 요인이라는 ‘대박신화‘는 여전히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벤처기업가는 저 산너머에 금이 있을 것 같은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없는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면 황금이라는 동기부여, 대박신화의 꿈이 필요하죠. 그리고 기존 상식이나 사고의 틀을 깨는 열정과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바타가 그렇게 돈을 벌 줄 누가 상상했으며 휴대폰으로 영화까지 볼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남들이 생각도 못한 일, 가지 않은 험한 길을 가려면 단순한 호기심보다는 커다란 꿈을 꿔야 합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정직한 벤처 실패는 귀중한 국가자원“

그 역시 여전히 꿈을 갖고 있다. 40대 중반이지만 나이 역시 의식하지 않는다. 돈벌이보다는 새로운 일을 한다는 도전 자체를 즐기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며 실패를 쉽게 인정하는 성격이어서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언젠가 자금유치를 위해 투자자를 만나러 가는데 운전기사가 지리를 잘 몰라 엉뚱한 길로 들어서 약속시간에 늦은 일이 있었다. 동행한 이들은 안절부절 못하는데 그는 평화롭게 웃으며 투자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발 동동 구르며 불안해한다고 투자가가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어서란다. 술자리가 잦지만 안주를 잘 먹어 숙취도 없고 머리나 등을 붙일 곳이 있으며 30초 안에 잠이 든다. 술 먹다가도 졸리면 자동차 안에 가서 쪽잠을 자고 온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기타 연주와 노래 솜씨도 수준급. 재즈가수 윤희정씨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고 지금도 후배들과 함께 연주를 즐긴다. 문화산업포럼, 벤처리더스클럽 등 모임에도 다양하게 참여하고 대학생, 고교생인 두 딸과 함께 다니면 원조교제라는 오해도 받지만 딸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대화도 많이 한다. 딸들에게도 ‘성공하라‘ ‘공부해라‘고 들볶지 않는다. 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어요. 저보고 대학 떨어지면 전문대학 가고, 전문대도 떨어지면 공장 가라고 하시더군요. 대학 합격자 발표 보고 집에 오니 글쎄 신문에 난 전문대 입시요강을 오려서 보여주시며 ‘아, 합격했니?‘ 하시더군요. 부모님이 강요하지 않으니까 제가 더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어요.”

‘벤처의 대부‘인 그는 후배들을 위한 ‘벤처 천사‘ 노릇을 하며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물론 주변에선 ‘실패했던 사람이 누굴 도운단 말인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파본 사람만이 그 상처의 치유법을 아는 법. 고시학원의 명강사는 판검사님들이 아니라 역시 고시에 숱하게 떨어져본 이들 아닌가.

글/유인경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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