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이야기꾼' 소설가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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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신화학자이자 소설가 이윤기씨(57)가 '그리스로마 신화' 시리즈 3편인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를 또 펴냈다. 1백20만권이나 팔린 그리스로마 신화 1, 2편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터라 기꺼이 책을 사면서 인세를 계산해보니 부럽기도하고 21세기에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이란 옛날이야기로 이렇게 부와 명예를 누리는 그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신화 이야기꾼' 소설가 이윤기

대통령을 비롯 온 나라가 '과거사' 밝히기에 힘쓰고 중국까지 우리나라 고조선 역사를 멋대로 해석하는 요즘, 과거사에 능통한 신화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무슨 비결로 그렇게 미친듯이(?) 일을 해내는지 궁금해 과천 한적한 주택가의 집을 찾았다. 

아무리 죽기살기로 돈을 벌어다 줘도 내 방 하나 없는 가장들에겐 부럽기 그지없는 24평이나 되는 서재, 5,000권이 넘는 책 속에서 그는 성주처럼 앉아 있다. 진홍색 셔츠에 힙합스타일의 청바지, 무좀이 있는지 발가락 양말을 신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스타워즈〉에 나오는 스승 오비원이나 인디언 현자처럼 보여 뭔가 예언을 할 것만 같다.     

그는 자유직업인이지만 대부분의 약속을 오후 5시 이후로 잡는다. 그전까지는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는 등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오전 8시 정도부터 오후 5, 6시까지 보통 샐러리맨처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일을 한다.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씨가 자신은 소설을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고 작가의 상상력보다 성실함을 강조했지만 이윤기씨 역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할 만큼 근로정신이 뛰어나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인터뷰나 손님맞기 등을 하고 오후 6시가 지나면 술을 마신다. 그는 자칭 알코올중독자다. 하루에 소주 2, 3병은 꾸준히 마셔왔단다. 양평 작업실 이름 역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집'이란 뜻의 '디오니소시온'이다. e-메일 아이디 과인(kwine)도 코리아와인의 준말이란다.

"술을 안 마시면 뇌가 계속 활동하고 일을 하기 때문에 알코올로 뇌를 쉬게 해주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꿈속에서도 계속 문장을 해석하려고 끙끙대고 가장 적확한 표현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밥을 먹으나 누굴 만나도 머리만 따로 도는 게 얼마나 고문입니까. 술을 마셔서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면 '그래, (삶이란)이렇게 가는 거야'라고 관조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도 지금까지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다. 술이 일이나 삶을 방해한 적이 없고 자신과 주변을 즐겁고 재미있게 해주기에 술 끊을 생각도 전혀 없단다. 숱한 그리스 신들 가운데에서 제일 애착이 가는 신도 디오니소스란다.

"디오니소스는 격정의 신, 생성과 부활의 신입니다. 해마다 포도가 시들면 죽었다가 봄이되면 살아나길 반복하죠.

참 허무하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하지만 또 디오니소스는 술과 축제의 신이니 얼마나 신명납니까. 가장 대비되는 아폴론이 이성적이고 긍정적인 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끝없이 혼돈을 제공하는 말썽꾸러기이자 자신을 '하빠리', 즉 2류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신입니다. 자신을 일류, 엘리트라고 믿는 순간, 사람들은 오만에 빠져 내리막길을 걷게 되거든요. 이류들의 세상이야말로 발전적이고 평화롭지요.

하지만 현대는 상업의 신이자 도둑들의 수호신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시대입니다. 빌 게이츠를 떠올리면 되죠. 뭐든 하나만 잘해서 돈을 벌면 다른 허물을 덮고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란 말이죠. 가끔 주변 사람들과 신화로 사업을 해도 성공할 거라는 농담도 해요. 디오니소스 술집,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가 운영하는 러브호텔, 죽음의 신 히데스의 장례식장, 헤르메스의 무역컨설팅....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덕은 박제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그 신들을 오늘의 사회나 문화현상에 하나씩 세워볼 수 있고 아직도 우리 삶에 그대로 작동되는 현재진행형이란 겁니다."

고등학교 중퇴한 게 제일 잘한 일이다

'신화학자'로 불리고 가장 탁월한 번역자로 꼽히지만 그는 그 흔한 박사학위는커녕 중학교 이후엔 제도권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학교가 내 공부를 방해해서'란 이유로 고등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로 신학대학에 잠시 다닌 게 전부다. 게다가 멀쩡하게 미국 명문대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 중인 딸과 영화학을 공부하는 아들에게도 수시로 "학교 그만둬라"고 권하고 있다. 화려한 이력서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성공도 하고 무엇보다 즐겁게 살기 때문이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신화 이야기꾼' 소설가 이윤기

학교를 자신이 퇴학시켜버린 것. 학교란 컨베이어벨트에서 뛰어내린 걸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부한다.

학교에서 나온 후 몇 달은 클래식 음악 감상실에서 하루 종일 바흐, 베토벤 등 음악을 듣고 헤밍웨이, 오 헨리 등의 소설은 영어로,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 등은 일어로 읽었다. 그가 10대에 썼다는 영어사전은 귀퉁이가 너무 낡아 잘 펴지지도 않는 데다 갈색 얼룩이 있다. 공부하다 코피가 나면 사전 모서리로 쓱 닦았던, 미친듯이 공부에 열중했던 흔적이다.

"책이건 음악이건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감자 줄기 캐듯 한없이 파고들었죠. 사전도 통째로 외고 영어 단어의 경우도 어근을 캐가며 자꾸 단어를 넓혀가고.... 열등감일 수도 있고 과대망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뭐든 끝장을 봤죠."

고교 중퇴 후 어머니를 도와 농사도 지었고 제분소 등 공장에서 일도 하다 검정고시를 봤다. 신학대학에 다니다 또 그만두었다.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갔고 1971년에는 월남전에 참가, 맹활약하며 훈장까지 받았다. 전투병으로 은퇴한 후 영내 도서관에서 사서노릇을 하며 남들이 전기밥통이나 텔레비전을 사는 돈으로 영어판 책들만 잔뜩 샀다. 제대하고선 다시 공사판을 전전하다 1975년 청소년지 〈학원〉의 기자가 됐다. 공사판 이씨는 이기자가 됐고 그곳에서 미술전공으로 편집기자로 일하던 아내를 만났다. 동양화가인 아내는 30여 년간 가장 멋진 술친구이며 여행파트너이고 서로 가르치는 교사란다.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조영남씨는 "이윤기의 능력 중 다른 능력보다 한 여자와 30년을 삼시세끼를 먹으며 해로하는 것이 가장 경이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

서른 살인 1977년 소설 〈하얀 헬리콥터〉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그리곤 가장으로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번역을 했다. 한 달에 한 권꼴로, 카사노바가 여자 낚아채듯 책을 펴냈다. 번역을 위해서는 언어는 물론 역사, 미술사, 과학사 등 전문적인 분야의 지식이 필요했다. 번역을 하며 글쓰기를 배웠고 그러면서 문학의 깊은 우물을 파들어가니 그곳에 신화가 있었다.

"난 낯선 것의 낯을 익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어느 나라를 여행하면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 우리나라와 얼마나 같은가를 묻기를 좋아합니다. 신화를 연구하며 자료수집차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도 우리와 전혀 다른 그리스 로마 신은 물론 다른 나라와 설화, 민담들을 통해 지금 우리와 무엇이 비슷하고 얼마나 인간과 같은가를 연구합니다. 그러다보니 신화전문가가 되어 있더군요."

신화는 무심콜로지

타고난 머리 덕분인지, 뇌의 기억용량이 비정상(?)적으로 큰지 그는 2,500여 그리스 로마 신들의 이름은 물론, 그와 관련된 인간-지명까지 줄줄이 다 왼다.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터뷰 도중 거론하는 별별 이상한 신들의 발음조차 어려운 이름들을 듣고 적느라 솔직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윤기씨 이전에도 신화 관련 서적은 수두룩했는데 왜 이제야 대한민국에 신화붐이 이는 걸까.

[유인경이 만난 사람]'신화 이야기꾼' 소설가 이윤기

저는 신화를 '무심콜로지', 즉 무심코 한 말들이 전해져 인간들이 집대성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심코-무의식적으로 민간들 사이에 굴러다니던 숱한 이야기들 가운데 계속해서 재편집되고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되지 않은 영원한 클래식이 신화죠.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써내려간 것이 신화이고 과거 사람들이 무심코 말한 진실이 신화의 기원입니다. 전 신화해석자가 아니라 '난 이렇게 보는데요'라고 전해주는 이야기꾼이고요."

그래도 신들의 이야기라면 뭔가 근사하고 모범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른 나라 신들과 달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어찌된 일인지 한결같이 바람둥이에, 사기도 치고, 화도 잘내고, 욕심 앞에선 애비-에미도 없는 등 별 부도덕하고 치사한 짓을 일삼아 인간만도 못한데 왜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전하는 걸까.

"도덕이란 게 뭐죠? 그건 신들이 정한 규칙이 아니라 신화 이후에 인간들이 만든 겁니다. 개인을 재산으로 보는 국가에 의해 조작되고 관리되어온 거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야 국부가 형성되는 데다 일부일처 등으로 규제해야 다스리기 쉽잖아요. 이젠 국가가 그렇게 개인의 인권을 억누르지 못하는 시대이니까 제도에 갇혔던 인산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거죠."

그런데 그 매력적인 신화이야기가 하마터면 세상에 빛을 못볼 뻔했다. 그는 1997년 미국 미시간 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 웅진출판사에서 '고등학교용 참고서 전집을 만드는데 부록으로 끼워넣을 신화 입문서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다른 부록은 이어령 선생이 쓴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머리와 가슴을 후려친 이어령 선생의 책들을 떠올리며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이젠 아는 척 좀 그만하고 쉽게 써보자'고 마음먹고 썼다. 그런데 대학입시제도가 바뀌면서 전집 판매가 중단되어 책으로 펴내지 않았다. 그러나 눈밝은 출판사 직원이 1999년에야 연락을 해왔다. 그는 4개월간의 유럽 취재 여행을 다녀와 각종 자료를 튼실히 모아왔고 사진-도판 등을 곁들여 럭셔리한 신화책을 탄생시켰다. 그후 '이윤기'란 이름은 신화의 브랜드가 되었다.

최근 일어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화제를 돌렸다. 중국도 문제지만 우리가 단군신화 등 우리 신화를 너무 무시하고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탓이 아니냐고 물었다.

"지금 중국은 자본주의로 승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삼황오제 시절로 돌아가려는 것 같아요. 우왕의 묘나 신농씨 묘를 남산만하게 만들더군요. 공산주의 때문에 잃어버린 신화를 너무 오버해서 찾다보니 한반도까지 뻗쳐온 거죠. 반면에 우리는 신들을 너무 소독시켜버렸어요. 숨도 못쉬게....

일본 동경에 가면 한 시인이 돈벌러간 아내 대신 아이를 보다가 너무 술이 마시고 싶으니까 아이를 전봇대에 매달아놓고 술집에 갔던 전봇대까지도 문화재처럼 보전해요. 문화란 그런 것들을 간직하고 복원해서 무의미한 것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겁니다. 작은 신화들을 문화 콘텐츠로 만드는 것은 나라의 힘과도 연관됩니다."

이윤기씨는 그리스 로마만이 아니라 권역별로 세계의 신화 전집을 낼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동북아시아, 힌두, 게르만, 바빌로니아 등 각 지역의 신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시간나면 현지로 달려가 직접 신들의 자취를 느끼고 영혼의 대화를 나눈다. 신화와 신들의 존재를 믿기에 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매일 질리지도 않고 신화의 세계를 파고든다.

은둔자처럼 공식활동도 별로 없고 남 앞에 나서기도 싫어하지만 흥나면 노래 〈봄날은 간다〉나 조용필의 노래, 미소라 히바리의 〈엔카〉를 기가 막히게 불러대는 신명넘치는 사나이. 매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마셔대지만 하루 10시간은 일하고 자연이 좋아 양평 텃밭에 1,500그루의 나무를 심은 사람.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준 아프로디테보다 자신이 꿈꾸는 여성을 정성껏 대리석으로 조각한 피그말리온의 순정과 열정을 믿는다는 그. '누구도 하루 8시간을 꼬박꼬박 한눈 팔지 않고 정진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노력파가 이윤기씨다.

무엇보다 그의 오늘날의 성공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 온 것 같다. 가난한 집안에 막내로 태어나 이야기꾼 할머니 밑에서 자란 것, 나이차가 많은 형들 덕분에 빨리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 농사짓고 공사장에서 일하느라 체력이 길러진 것, 학교를 때려치운 것 등 남들에겐 처절한 콤플렉스를 그는 '축복'이라고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감사해한다.

게다가 그는 평생 파내도 파내도 마르지 않고 명예훼손으로 시비걸 이도 없는 '신화'란 광맥을 발견한 데다 딸에게까지 세익스피어란 유산을 물려주었으니 얼마나 복많은 사람인가. 그리고 그가 인생의 목표를 '엄숙'이 아니라 '재미'로 삼아 세상에서 제일 위트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니 독자들은 또 얼마나 복이 많은가.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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