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박주연 | “이런 게 채식이라면 매일이라도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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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신사동 ‘레귬’

비건 레스토랑 레귬의 ‘콜리플라워’ 요리 / 박주연 제공

비건 레스토랑 레귬의 ‘콜리플라워’ 요리 / 박주연 제공

어언 19년 전 일이다. 대학생이던 나는 처음으로 인생 최대 용기를 낸다. 뉴질랜드라는 나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한 것!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도착한 그곳에서 평생 간직할 추억을 쌓았다. 현지 친구들을 사귀어 바다로 캠핑장으로 놀러 다녔다. 한식당과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에 없는 설움도 느꼈다. 밤하늘 별이 쏟아지는 남섬의 어떤 예쁜 곳에서는 호텔 청소 일을 했다. 거기서 함께 일하던 스테파니와 친구가 됐다. 타지에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든든한 언니처럼 도움을 준 스테파니에게, 나는 한국의 음악, 전통놀이(?)와 같은 ‘K컬처’를 전수해주었다. 아마 스테파니는 ‘똥침’을 아는 유일한 뉴질랜드인일 것이다.

박 변호사가 레귬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호박꽃 커틀릿’/ 박주연 제공

박 변호사가 레귬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호박꽃 커틀릿’/ 박주연 제공

내가 떠나는 날 눈물을 훔치던 스테파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후 그는 넷플릭스를 통해 ‘K드라마’를 완전히 섭렵했고, 결국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 그렇게 우리는 18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긴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똑같다고 느끼는 서로를 보며 얼마나 반갑고 좋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서울 관광을 시켜주면서 하나의 난관과 맞닥뜨려야 했다. 스테파니는 약 30년째 채식을 해오고 있는 비건이다. 그처럼 100%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채식을 지향한다. 문제는 그를 데려갈 식당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최근 들어 조금씩 비건 식당과 메뉴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아직은 ‘어렵게 찾아내야 하는’ 수준이다. 두부요리 전문점을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추천 메뉴도 샐러드, 채소김밥과 비빔밥(달걀은 빼달라고 미리 주문해야 한다), 감자전 등이 고작이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면야 메뉴가 더 다양할 수 있겠지만 사서 먹으려니 고를 수 있는 음식이 제한적이었다.

파인다이닝 코스요리의 디저트로 나오는 ‘레몬 버베나 아이스크림’/ 박주연 제공

파인다이닝 코스요리의 디저트로 나오는 ‘레몬 버베나 아이스크림’/ 박주연 제공

멀리 바다까지 건너온 손님을 잘 대접해주고 싶은 게 우리네 마음이라, 뭔가 특별한 곳이 없을까 찾아보다가 ‘레귬’을 발견했다. 식물성 재료만 사용한다는 비건 식당이었다. 심지어 ‘파인다이닝’을 제공한다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흥미가 생겼다. 처음 접해보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예약 당일, 스테파니와 나, 다른 한 친구까지 모두 셋이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생각보다 더 고급스러운 식당 분위기와 서비스에 놀랐다. ‘오픈 키친’도 인상적이었다. 셰프 네댓 분이 개방된 공간에서 분주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갓 나온 음식 위에 꽃잎이나 허브 잎을 하나씩 정성스레 장식하는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곧이어 정갈한 플레이트에 코스 요리가 하나씩 담겨 나왔다. 처음으로 나온 ‘호박씨’ 요리는 호박과 두부를 이용한 푸딩 같은 식감의 음식에 오렌지 제스트(가늘게 채를 치거나 아주 잘게 썬 껍질), 셀러리, 호박씨를 곁들여 상큼하면서도 향긋했다. 아삭함과 고소함이 느껴졌다. 입맛을 충분히 돋워주었다. 다음의 ‘오이와 퀴노아’ 요리는 오이를 소금에 절인 뒤 속을 파내 퀴노아로 채우고, 그 위에 멜론과 허브 등을 올렸다. 살사베르데 소스와 함께 먹으니 누구나 좋아하는 ‘단짠’의 조합에 싱그러운 매콤함이 더해졌다. 그리고 추가한 메뉴로 ‘호박꽃 커틀릿’이 나왔다. 호박꽃 안에 채소 소를 넣어서 튀긴 기발한 음식이다. 처빌 오일과 견과류 크림소스 또는 허브줄기를 갈아 만든 소금에 취향껏 찍어서 먹으면 된다(이 요리는 나의 개인적인 ‘원픽’이 됐다).

이어서 나온 ‘영실표고와 나물파스타’는 표고버섯을 이용한 국물, 시금치로 만든 파스타 위에 목이버섯과 다양한 나물을 곁들였다. 쫄깃한 식감에 버섯의 깊은 맛과 짭조름한 나물 맛이 좋았다. ‘주키니 수프’는 주키니와 바질을 갈아 만든 콜드 수프에 달달한 초당옥수수와 바질 등 여러 허브를 넣었다. ‘사워 도우’(sour dough·천연발효종을 써서 만드는 빵)에 수프를 올려 먹다 보니 빵과 수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칼질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타이밍에 ‘콜리플라워’ 요리가 나왔다. 자투리 채소를 이용한 업사이클링 요리다. 채소를 오래 끓여 만든 소스 위에 딱 먹기 좋게 구운 콜리플라워(브로콜리와 모양이 비슷한 슈퍼푸드의 일종)와 ‘커리 페이스트(Curry Paste)’를 올렸다. 구운 사과와 고구마 퓌레도 함께 나왔다. 곧이어 레몬버베나(강한 레몬 향이 나는 허브 식물의 일종) 아이스크림과 과일조림, 차를 디저트로 모든 식사를 마쳤다.

박주연 변호사가 ‘오이와 퀴노아’ 요리를 맛보고 있다. / 박주연 제공

박주연 변호사가 ‘오이와 퀴노아’ 요리를 맛보고 있다. / 박주연 제공

일일이 열거하기 벅찰 정도로 창의적인 요리의 행렬이었다. 다양한 재료에다 조합도 기발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가졌던 ‘채식 메뉴는 제한적’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과 입이 모두 즐거워지는 경험이 무엇인지 체험했다고나 할까. 요리가 나올 때마다 직접 설명해주는 셰프의 모습에서 그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외국인 손님을 고려해 영어로도 음식을 설명해주던 배려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뉴질랜드로 돌아가는 날, 스테파니는 최고의 맛집으로 이곳을 꼽았다. 그날 함께 간 친구(평소 육식을 선호하는) 또한 “이런 것이 채식이라면 난 매일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내게도 이곳은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맛집’이 됐다.

‘자고로 레스토랑이라면 스테이크 정도는 썰어줘야 한다’는 세간의 인식이 굳건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런 곳이 탄생했을까. 직접 물어봤다. 미셰린 2스타 헤드셰프 출신인 성시우 셰프는 채식과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강압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접목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이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정작 채식을 하는 모친이 드실 음식이 없다는 점도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완전한 비건부터 비건이 아닌 사람들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식물성 재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오이와 멜론을 함께 먹어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했고, 집에서 그렇게 만들어 먹으며 ‘채식의 즐거움’도 알아갈 수 있도록 멋진 요리로 승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투리 채소를 버리지 않고 메뉴에 활용하고, 코코넛 껍질이나 커피콩 자루를 재사용해 만든 접시를 이용함으로써, ‘제로웨이스트’와 ‘업사이클링’을 실천 중이다. 이러한 곳이 늘어가고 채식 문화가 점차 자리 잡아간다면, 육식이 초래하는 수많은 동물의 고통과 환경 파괴도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게 ‘비건 식당’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그의 바람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드는 일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 아직은 ‘비건 식당은 비건들만 가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식물성 재료에 수만원을 쓸 수 없다’는 인식도 제법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한 번 들러보시라. 기대 이상의 즐겁고 색다른 경험과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편견과 구분도 없이 모두가 가끔이라도 채식을 즐기고, 동물과 환경까지 아울러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꿈꿔본다.

필자는 법무법인 방향 소속 변호사로, 사법시험 합격(2009년) 후 2012년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2017년 동물권을 연구하는 변호사들의 공익단체인 PNR(People for Non-human Rights)를 공동설립해 동물학대 고발, 입법 제안 등 동물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물건이 아니다>, 공저로 <동물보호법 강의>, <동물법, 변호사가 알려드립니다 1·2> 등이 있다.

<박주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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