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성의 의식 변화와 진정한 가사 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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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아내가 20일째 부재중입니다. 두어 달 전쯤 미국 외갓집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딸의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주에서 열리는 경연대회에 참가하는데, 보호자 동행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시지만 소통이 어렵고 고령이라 힘들어 엄마가 동행하려 한 달 예정으로 미국에 가면서 집을 비우게 된 것입니다. 제게 막내까지 맡기고 장기간 집을 비운 경우는 처음입니다. 난생처음 혼자 오롯이 대학생·중학생·초등학생인 3명의 아이를 뒷바라지하게 됐습니다.

떠나기 전에 아내는 살림과 아이들 학교생활, 방과 후 활동과 관련해 챙겨야 할 많은 사항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힘든 일들이 아닌 듯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공직을 떠난 후 시간 여유도 조금은 생겨 어떻게든 애들을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방학을 맞아 귀국한 대학 1학년인 첫째 딸이 많이 도와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공항으로 배웅할 때는 오랜 세월 집안일 하느라 고생도 했으니 오랜만에 둘째와 오붓하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배려하는 듯한 말도 했습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닫게 됐습니다. 혼자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있을 때 청소와 설거지를 조금씩 도와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집안일은 끝내고 돌아서면 또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특히 초등학생인 막내딸을 보살피는 것은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이 소모되는 고된 일이었습니다. 대학생 큰딸은 온라인 계절학기로 여유가 없긴 했지만, 아직 자기 생활을 추스르기에도 벅찬 어린아이임을 알게 됐습니다. 아내 없이 보낸 일주일은 한 달도 더 된 것 같았고, 그가 집에 돌아오는 날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여태껏 가사를 담당하는 이의 삶이 이렇게 힘든지는 미처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도 아이들도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20일은 돌이켜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주부의 일상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이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많은 일을 했던가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눈 뜨면서부터 잘 때까지 계속되는 주부의 섬세한 손길과 배려가 없다면 우리 일상은 뒤죽박죽이 되고 사회생활도 엉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주부들이야말로 하루하루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잠깐이지만 집안일과 사회생활을 함께해보니 가사와 직장 일의 병행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역할을 주로 도맡아온 여성들이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며 슈퍼우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까지 갖게 됐습니다.

여성 고용률, OECD 하위권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많이 늘어났습니다. 산업사회 발전으로 많은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면서 가사와 직장 일을 병행하는 여성 비율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성 고용지표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의 여성 고용률은 57.7%로 OECD 38개 국가 중 30위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 10대 대국으로 올라서고, 많은 첨단 분야의 기술도 세계 선두권에 진입했습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여성 고용률이 OECD 하위권에 속한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사와 직장 일을 병행하는 것이 다른 선진국 여성에 비해 어려움을 보여주는 징표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21년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20년 여성 고용률은 20대 후반이 68.7%로 가장 높고, 30대 초반 64.5%, 30대 후반 58.7%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통계자료는 여전히 결혼·출산·육아 등의 문제가 우리나라 여성들이 직장 일을 계속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급속히 변하고 있지만, 가족의 온전한 일상을 챙겨주는 여성한테는 예전과 다름없이 희생과 인내의 연속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비혼주의 증가, 저출생 문제 등 요즈음 심각하게 제기되는 사회문제들도 이런 현실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절망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오래전부터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정책을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에 반응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하나씩 집행해 가면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가사 경험을 통해 그간의 정책들 외에도 잘 바뀌지 않는 우리(남성)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둔 교육과 정책개발이 꼭 필요함을 깨닫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추진된 육아휴직 제도 도입·확대, 아동 보육 시간·시설 확충, 유연근무제 시행 등과 같은 것들도 물론,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이 시행돼도 사람(특히 남성)들 의식에 변화가 없다면 여전히 여성들이 힘든 가사의 많은 부분을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녀 차별 문화 개선해야 이제부턴 여성과 가정생활을 중시하는 의식을 갖도록 교육을 강화하고 정책개발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많은 전통문화를 개선해야 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힘든 가사노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남성이 직접 가사를 담당하고 자녀 양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련 정책개발에 더 많은 고민과 연구를 집중시켜야 합니다. 부부가 균형 있게 가사를 분담하며, 자녀들을 돌보는 문화가 형성될 때 조화로운 가정생활이 가능하며 더 많은 ‘여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3년 결혼생활 동안 밖으로만 돌며 집안일은 거의 돕지 못한 저의 생활 행태를 반성하면서 내린 나름의 결론입니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부부가 집안일을 적극 분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돌아오면 어쩌면 저는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일상에 한 달 동안 경험한 가사 분담이 추가돼 있으리라는 점입니다(20일간 세 아이와 부대끼며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막내딸과 나눈 사랑의 교감은 잠시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득입니다. 평생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아빠가 좀처럼 알 수 없는, 엄마와 아이 간의 유대가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과 인내로 살아온 아내와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정목 세무사·세무법인 광화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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