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이를 기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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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나는 애들이 싫었다. 기차나 버스처럼 좁은 공간에서 쨍쨍 우는 소리가 거슬렸고, 음식점에선 뛰놀다 국그릇을 엎는 모습에 화가 났다. 어렵게 만든 필기 자료를 벅벅 찢고 책에 낙서한 아이가 내 사촌동생뿐일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애한테 왜 그러냐며 되레 혼날 땐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지난 3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1학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강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지난 3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1학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강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자라면서는 애들 부모가 얄미웠다. 생각해보면 애들이 무슨 죄인가. 배고파도, 덥거나 추워도 애들은 운다. 그게 본능이다.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떼를 쓴다. 예의범절은 자연이 아니라 지난한 교육에 겨우 따르는 성과다. 백화점 마트에서 날뛰는 아이를 두고 부모가 “애가 그럴 수도 있죠”라고 하자 적반하장이라며 중년 부인이 했다는 말이 그래서 인상 깊었다. “애는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요즘은 생각이 좀 복잡하다. 주변에 아이를 가진 친구가 꽤 늘었다. 어떤 애는 첫걸음마를 뗐고, 유달리 일찍 결혼한 친구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얼마나 예쁜지, 야단 못 치는 집의 사정이 슬슬 이해된다. 반면 ‘왜 저러나’ 싶을 만큼 엄격한 친구도 있다. 이상하게도 호되게 기른 아이가 사고뭉치다. 교육이 꼭 단정한 성인을 기르는 건 아니라는 수수께끼 같은 명제를 경험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래도 ‘정순신 사태’는 좀 아니지 싶었다. “돼지새끼”, “빨갱이”, “더럽다”, “꺼져라”. 기사를 쓸 때 보통 ‘XX’로 처리할 법한 자녀 정씨의 폭언에도 정순신 변호사 등 부모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언어적 폭력이니 맥락이 중요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정씨에게 학교가 전학 처분을 내리자 집행정지 신청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했다. 피해자는 1년여를 더 정씨와 같은 학교에 다녀야 했다.

부모의 죄를 자녀가 짊어져야 한다는 ‘연좌제’ 논리엔 동의 않지만, 자녀의 못된 행동에 부모 책임을 묻는 말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자녀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씨는 평소 친구들에게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다”, “판사랑 친하면 무조건 승소한다”며 당시 고위 검사였던 아버지를 자랑했단다. 이런 말이 어디서 나왔겠나. 정씨 부모는 개념을 가르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개념을 가르친 것이다.

부모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열심히 가르쳐도 악한으로 자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볼 땐 ‘속수무책’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동시에 그런 변명은 제대로 교육해 본 뒤에나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 변호사가 평소 아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학폭 이후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메시지는 분명하다. ‘타인으로부터 네가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과는 정반대다. 같은 인간이자 동료 시민을 대하는 자세를 아들 정씨는 그렇게 배웠을 테다.

언젠가 부모가 된다면, 최고로 윤리적인 인간은 못 돼도 윤리적 최저선은 가르치는 어른이고 싶다. 무사히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정씨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조문희 정치부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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