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세입자가 갑? 웃기지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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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난생처음 써보는 내용증명의 시작은 이랬다. 수신인은 거주 중인 오피스텔의 임대인, 즉 집주인이다.

지난 3월 8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추모제에서 한 시민이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다’라는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8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추모제에서 한 시민이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다’라는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24개월 전세 만료를 한 달 앞두고 있다. 집주인은 지금까지 수개월째 “돈을 돌려줄 수 있을지 확답을 할 수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만기 3개월 전부터 계약 연장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문자와 전화로 여러 차례 알렸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첫 통화에서 집주인은 자신의 처지를 한 시간 가까이 설명했다. “그럼 보증금을 시세로 낮춰달라”는 내 제안은 단칼에 거절했다.

개인 송사, 가족·친구 문제 등 집주인의 하소연은 끝이 없었다. 정작 임차인인 내 입장엔 관심도 없었다. 전세 계약 연장을 하지 않기로 한 건 두 배 가까이 오른 전세 대출 이자의 영향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빌라왕’, ‘건축왕’ 등 수사 관련 기사를 쓰며 바지사장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진 돈도 없이 수십, 수백 채의 집을 소유하는 이들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현재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조회하자 집주인이 소유한 부동산이 한 건물에 3채 이상이란 걸 알게 됐다. 갭투자였다.

내용증명을 보내기 전날, 집주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내용증명을 보내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다음날 통화에서 그는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고 했다. 상의 없이 내용증명을 보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분노가 치밀었다. 언제나 읍소하는 쪽은 나였고, 대화를 청한 쪽도 나였다. 말문을 잇지 못하자 그는 선심을 쓰듯 “보증금을 조금 낮춰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제시한 금액은 여전히 시세보다 높았다.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너무 늦었습니다.”

전셋값이 폭락하자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 갑을 관계가 뒤바뀌었다’는 내용의 보도가 경제지를 중심으로 쏟아졌다. ‘집주인의 눈물’, ‘을이 된 집주인’과 같은 수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언론은 세입자의 처지를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모님과 아가씨. 내 경우엔 호칭부터 균형이 무너졌다. 보증보험을 통해 전세금을 돌려받으려면 2~3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절차 진행부터 마음고생까지 세입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집 없는 사람은 이 땅에서 결코 ‘갑’이 될 수 없다.

전세사기를 취재한 동료는 부동산 전문가로부터 “젊은 사람들이 눈이 높아져 사기를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신축에 현혹돼 알아보지도 않고 ‘깡통 전세’를 덥석 문다는 취지였다. 좋은 집에 살고자 하는 바람이 왜 사기 피해의 원인이 돼야 하나. ‘융자금 없음, 안심(전세 대출) 가능, 허위 매물 아님….’ 바지사장을 앞세운 업자들은 서류상으로 깨끗한 부동산을 미끼로 내건다. 작정하고 속이는데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대로 된 대책이 없다.” 이른바 ‘미추홀구 건축왕’에게 전세사기를 당한 30대 남성은 지난 2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전세사기 범죄마저 피해자 탓을 한다면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2030세대’는 무얼 믿고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까.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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