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환영 대신 ‘장작’ 매질…이 어부들에게 국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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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강원 속초시청 앞 어느 여관. 방 입구에는 참나무 장작개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직 여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 겨울이었다 한들 군불을 지필 리도 없는 여관방에 장작이 왜 있을까. 여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많은 장작의 용도를 알게 됐다.

2009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당시 남측 노순호씨가 납북어부인 동생 성호씨를 만나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9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당시 남측 노순호씨가 납북어부인 동생 성호씨를 만나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무릎을 꿇고 앉으니 다짜고짜 무릎을 발로 짓밟았으며, ‘이 빨갱이 같은 새끼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 장작개비로 수없이 맞았다. (…)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했다. 지령을 받은 게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계속 구타가 이어졌다.”(설악신문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 13’, 엄경선 전문기자, 2022. 6. 27)

그는 어부였다. 조업 중 납북됐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돌아온 납북귀환어부 160명 중 한명. 정부는 이들이 속초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꼼꼼한 ‘신문’ 계획부터 세웠다.

어부들을 “신문 및 신변경비에 용이한 장소”에 수용한 뒤, “경찰 정보요원으로 신문반을 편성해” 일주일간 신문하고, “간첩 지령 사항과 전략정보”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여관방으로 끌려간 어부들은 장작개비로 매질을 당하며 ‘간첩’ 취급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어로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되는 어부가 많았다. 그들은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1년 이상 북한에 억류됐다가 대부분 귀환했다.

하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은 수사관들에 의해, 월선 조업과 탈출, 군사기밀 누설, 지령 사항 수수 등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영장 없는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도 흔했다. 그 결과 대다수 납북귀환어부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등으로 처벌받았다.

“납북됐다 돌아온 열다섯 살 소년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뒤집어씌운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가,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정신적인 피해와 고통, 심리적인 상처는 정말 아직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예요.”(김춘삼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진실규명시민모임 대표, 2022. 2. 23 필자와 인터뷰)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귀환 직후 처벌을 받고 난 뒤에도, 국가는 이들을 향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납북귀환어부들은 1차 처벌 이후에도 길게는 수십년 동안 감시와 사찰을 받았다.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감시의 대상이 됐고, 취업과 거주 이전에도 제한을 받았다. 심지어 이들을 ‘대북공작’에 활용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1969년 5월 강원 고성군 거진항으로 어선 23척과 150명의 납북어부가 돌아왔다. 7개월 전 북한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스물일곱 살 강모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의 증언에도 ‘장작’이 등장한다. 물론 이번에도 본래의 용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쓰였다.

“1년 실형 선고를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10년간 형사들이 매일 찾아오다시피 했다. (…) 한번은 2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한꺼번에 속초 검찰청 지하실로 불려가 하루 동안 구타와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무릎 사이에 장작을 넣어 짓밟고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설악신문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 2’ 엄경선 전문기자, 2021. 9. 6)

귀환 이후 수년이 지나, 다시 공안사건에 휘말려 2차로 처벌받은 경우도 많다. 김춘삼 동해안납북귀환어부피해자진실규명시민모임 대표 역시 그랬다. 그는 귀환 이후 11년이나 지난 1983년 다시 경찰에 끌려갔다. ‘고무찬양’의 죄를 뒤집어쓰고,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 20년 지날 때까지 교도소에 있는 꿈을 꿨어요.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깨는 거예요. 혹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평생 떨칠 수가 없어요.”(김춘삼 대표, 2022. 2. 23 필자와 인터뷰)

분단과 권위주의 통치가 만들어낸 국가폭력. 반공을 명분 삼아 만들어낸 ‘공포’의 희생자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가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1987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 파악된 납북어부의 규모는 459척, 3648명이었다. 그중 약 90%인 3200여명이 남측으로 귀환했다.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납북귀환어부 사건의 직·간접 피해자는 1만명을 훨씬 넘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납북귀환어부 사건의 진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였다. 2005년 출범한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납북귀환어부 사건 17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약 50명의 관련자가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다시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2월 풍성호·건설호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같은 달 납북귀환어부 982명(109척)에 대한 직권조사도 시작했다. 지난 2월 7일에는 직권조사를 통한 첫 진실규명 결과도 나왔다. 1968년 납북됐다가 이듬해 귀환한 대양호 등 23척 15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불법적인 수사를 받고 처벌받은 사건의 진실을 밝힌 것이다.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개별적인 재심 무죄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해 2월 진실을 규명한 풍성호·건설호 사건 피해자들도 11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은 뒤집어졌지만 시간마저 뒤집을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이가 세상을 떴다. 한명 한명 재심을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피해자가 너무 많고 세월은 너무 빠르다. 진실을 찾을 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과거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이도 여전히 많다.

피해자가 재심 신청서를 들고 찾아오길 기다려선 안 된다. 국가는 모든 피해자를 알고 있고, 모든 ‘증거’를 갖고 있다. 국가가 먼저 그들을 찾아서 진실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납북귀환어부를 소재로 단편 ‘명태와 고래’를 썼다. 작가는 ‘명태와 고래’가 실린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 2022)에 이런 ‘군말’을 덧붙였다.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의해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 짓밟힌 사람들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저만치 혼자서> 253쪽)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한 것은 김훈 작가의 탓이 아니다. “고통과 절망”을 지우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바로 국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반성문을 써야 할 사람은 김훈 작가가 아니다. 국가의 반성문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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