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방패연’ 타고 날고팠던 선감도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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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의 작은 나루터는 내게 ‘바람’으로 기억된다. 지난해 이맘때였다. 초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날쌘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던 날. 방패연 하나 하늘로 줄을 풀어놓는다면 훨훨 잘도 날겠다 싶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40년 전 섬에 살던 소년들에게 그 바람은 그렇게 낭만적으로 기억되지 못했다. 이제는 노인이 돼버린 소년의 몸이 덜덜 떨렸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옛 선감학원 터에 예술가와 시민들이 세운 위령비. 선감학원에 불법 구금됐다가 목숨을 잃은 아동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 가운데에는 방패연을 새겼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옛 선감학원 터에 예술가와 시민들이 세운 위령비. 선감학원에 불법 구금됐다가 목숨을 잃은 아동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위령비 가운데에는 방패연을 새겼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여기만 오면 원래 몸이 떨려.”(2021. 11. 23. 인터뷰)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 그가 선 선감나루터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아동들이 배에서 내려 처음으로 섬에 발을 디디는 곳이었다. 지금은 간척지 위에 펜션촌이 가지런히 자리 잡은 섬, 선감도. 이 섬이 ‘이름을 잃어버린’ 소년들로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경기도 사회사업협회는 기부금 50만원으로 선감도 전체를 사들였다. 이듬해 조선감화령 등에 근거해 부랑아 수용시설의 문을 열었다. 바로 ‘선감학원’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선감학원을 경기도로 이관했다. 1957년 경기도는 ‘선감학원 조례’를 제정하면서 제1조 “부랑아의 수용보호 및 직업보도를 위하여 선감학원을 둔다”는 규정을 통해 경기도가 선감학원의 설립 주체임을 밝혔고, 1982년까지 선감학원을 직접 운영했다.

선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40년간 수용된 아동 수는 최소 5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저는 거기(선감학원)다 분명히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형에 대한 정보를 줬어요. 천안시 신구동이라고 주소도 알려줬어요. 동네 인근에 화약고가 있어서 그것까지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보내달라고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죠.”(정○○,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인용.)

1968년 작성된 정○○의 선감학원 원아대장에는 “부모와 사별”했다고 적혀 있다.

부랑아 단속은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그냥 ‘그래 보이는’ 아이들을 잡아들일 뿐, 경찰과 경기도는 명확한 기준 없이 단속을 벌였다. 신원을 확인하기도 전에 부랑아로 분류했다. 일반 아동시설에 이미 수용 중인 아동을 부랑아로 분류해 선감학원에 보내기도 했다.

단속 이후에도 원아대장에 인적사항을 잘못 기재하는 사례가 많았고, 보호자에게 수용 여부를 통지하지 않는 등 아동복리법상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강제 수용했다.

수용 이후의 인권침해도 심각했다. 강제구금,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성폭력, 과밀수용, 부실급식…. 아동들은 보수도 없이 농사일과 양잠, 축산, 염전일 등 노역에 투입됐다. 단체기합과 폭행도 일상적으로 일삼았다. ‘원산폭격’, ‘나룻배’, ‘줄빠따’, ‘한강철교’, ‘비행기’ 등의 가혹행위가 기숙사의 사(舍)장, 반장은 물론 공무원들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방패연을 타고 엄마 품으로 돌아가기를 “장충당(별명)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특이해서 이름을 잊지 않아요.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도 같이 있었어요. 의정부에서도 만나 구걸도 같이했어요. 내가 여기서 탈출하면 죽는다고 말해줬는데 그다음 날 이놈이 탈출하다 죽어서 떠내려왔더라고요.”(박○○,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인용.)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 등에 시달리던 아동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지금은 간척이 이뤄져 이웃 섬들과 길이 이어졌지만, 그때는 어디로든 나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다. 탈출을 시도한 아이 중 상당수는 다시 살아서 뭍을 밟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9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일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유해 매장 추정지를 시굴한 결과 아동의 치아 68개와 유품인 단추 6개가 발굴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9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일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유해 매장 추정지를 시굴한 결과 아동의 치아 68개와 유품인 단추 6개가 발굴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살아남은 아이들도 제대로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많은 수가 퇴소 후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신질환, 인지기능 저하, 스트레스에 대한 비적응적 반응, 신체적 장해를 겪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선감학원 피해자 99명을 대상으로 한 트라우마 관련 설문조사 결과, 51%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선감학원이 만들어지고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 40년. 선감학원이 사라지고 그 진실이 국가에 의해 밝혀질 때까지 걸린 시간 역시 40년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0월 18일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무분별한 단속 정책을 주도한 법무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와 부랑아 단속의 주체였던 경찰, 선감학원을 운영했던 경기도”에 공식 사과를 권고했다. 또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와 특별법 제정 등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선감도 내 아동 희생자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신속히 추진하고, 추모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권고사항에 포함됐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9월 진행한 시굴 조사에서는 치아 68개와 유품인 단추 6개가 나왔다. 조사단은 암매장 유해를 모두 15~18세 남성으로 추정했다. 수습된 단추 역시 선감학원 아동이 입었던 원복의 단추로 확인됐다.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다. 2014년 예술가와 시민들이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한쪽에 작은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 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진 ‘방패연’. 어린 영혼들이 방패연을 타고 날아가 엄마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선감나루터에는 여전히 바람을 맞으며 소년들이 서 있다. 그들의 이름은 바람에 흩어져버렸지만, 원통한 마음은 여전히 나루터에 남아 있을 것이다. 빼앗긴 인생을 뒤늦은 진실로 되찾을 수 있을까. “이 비루한 역사”를 누구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삼가 오늘 무릎 꿇어/ 그대들 이름 호명하나니/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치듯 어희 돌아들 가소서/ 이 비루한 역사 용서하소서”(위령비에 새겨진 홍일선 시인의 시 ‘한 역사’ 중에서)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은 정부의 부랑아 정책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이 불특정 아동을 법적 근거와 적법 절차도 없이 단속한 후, 선감학원에 구금한 사건이다. 또한 시설운영 과정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생명권의 침해, 실종 등이 발생했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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