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행자의 경험을 공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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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해외 감독들의 신작을 유심히 살펴본다. 세계적 거장도 찾지만 덜 알려진 유망주들의 차기작 소식에 눈에 불을 켜곤 한다. 그중 주셩저(朱聲仄)라는 1987년생 중국 여성 감독의 작업을 주시하고 있다. 그의 2019년 작품 <프레젠트. 퍼펙트.>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 감독이 촬영한 건 없다. 대신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은 중국 내 마이너한 개인방송 진행자들의 채널을 편집한 것들의 조합이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다 보면 얻어걸리는 ‘인플루언서’는 등장하지 않는 대신, 작품에 소개된 개인방송은 흔히 사회적 소수자, ‘마이너리티’ 부류들이다. 하루종일 고공에서 타워크레인을 조종하는 기사, 시골의 휠체어 장애인, 거리의 무명댄서, 중화상 환자, 그 외 성소수자와 장애인들이 진행하는 온라인 방송이 조각조각 연결돼 현대 중국의 이면을 재구성한다.

「지구별 방랑자」 포스터 / TVING

「지구별 방랑자」 포스터 / TVING

개인방송을 통해 부와 명성을 좇는 행태가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경보가 울리고 있지만, 규제나 자정활동으로 근절되기란 요원해보인다. 과정이 아닌 결과를 추구하며 자극적·선정적 콘텐츠로 빠른 길을 찾는 풍조는 사회 일반 추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큰 성공을 얻진 못해도 다양한 사회구성원이 드러나지 않은 삶을 보여주거나 사회적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개인방송도 소소한 반응을 얻고 있다. 일확천금 대신 자신의 현실 활동과 온라인 방송을 연계해 자급자족의 작은 생태계를 확장해나가는 시도들이다.

독립영화 감독 중 유최늘샘이 있다. 몇몇 동료들은 그를 로드무비의 대가라고 부른다. 감독은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여러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모은 돈으로 현대판 무전여행을 감행하고, 그 경험을 자신만의 로드무비로 작업해왔다. 그런 감독의 세계일주 경험담은 <지구별 방랑자>(2021)로 집대성됐다. 2018년 5월 21일부터 2019년 11월 6일까지 535일 동안 8만5899㎞, 34개국을 하루평균 1만8400원(!)으로 다녀온 기록이다. 여행 중간에 강도를 만나 카메라와 촬영기록을 몽땅 잃어버리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을 이어가며 단신으로 촬영한 결과물이다. 온갖 제약이 만발하다 보니 영화라기보다는 브이로그 영상에 가까운 형식이지만 내용은 그저 고행을 넘어 세계 각국의 빈곤과 사회문제를 ‘세계시민’의 시야와 통찰로 담은 보기 드문 콘텐츠로 채워져 있다. 유명 관광지 대신 남미 인디오, 아프리카 유목민, 유럽 난민과의 일화가 가득하다. 감독이 당한 차별과 혐오는 3자로서 관찰한 그것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국내 대부분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는 선택받지 못했다. 기존의 선정 기준과 궤를 달리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은 지난 4월 말 온라인 개봉을 단행했다. 별도의 홍보는 없었다. 큰 반향은 얻지 못했지만 웨이브, 티빙, 올레TV, U+TV 등 다양한 공간에서 영화를 접할 수 있다. 감독은 지금도 곳곳에서 소규모 상영회를 열고 있다. 사고로 유실된 여행 전반부를 채워낸 영화와 동명의 여행 에세이를 지난 7월 말에 출간했다. 여기엔 보다 상세한 감독의 여정과 그가 듣고 본 세계의 가난과 모순이 가득 담겨 있다. 감독의 유튜브 채널 <유최늘샘 TV>에선 영화로 못다 한 이야기를 단편 클립으로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다. 몇십만, 몇백만 구독자와는 인연이 없겠지만 개인방송이 가져오리라 기대하는 쌍방향 소통의 정도를 걷는 이런 작은 실천은 좀더 조명돼도 좋을 법하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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