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러시아? 우크라이나? 베트남의 고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정치, 경제, 외교에 끼치는 파급 효과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와 크게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베트남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난 3월 27일 하노이 타이 하 성당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미사. 베트남 참석자가 우크라이나 나탈리아 진키나 대사 대리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을 하고 있다.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3월 27일 하노이 타이 하 성당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미사. 베트남 참석자가 우크라이나 나탈리아 진키나 대사 대리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을 하고 있다.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러시아는 베트남의 절대 우방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0년까지 지난 20년 동안 베트남은 탱크, 전투기, 잠수함 등 군사장비 80% 이상을 러시아에서 구입하고 있다. 흔히 월남전이라 부르는 2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1955~1975) 당시 러시아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트남에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베트남의 군관, 기술자, 과학자 등 많은 인재가 러시아에서 유학했다. 현재 군, 정계, 재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베트남을 움직이는 엘리트 상당수가 러시아 유학파들이다.

베트남 국민은 러시아 비난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 역시 베트남 유학생들을 받아 교육하고 전쟁물자를 지원해준 절대 우방국가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이면서 우크라이나와 인연이 있는 베트남 정·재계 인사들이 상당수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기업 빈그룹의 팜 낫 브엉 회장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다가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사업을 시작해 큰돈을 번 다음 베트남으로 돌아와 지금의 빈그룹을 세웠다. 비극적이게도 베트남과 러시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 20주년을 기념한 지 3개월 만에, 베트남이 우크라이나와의 수교 30주년을 기념한 지 2주 만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지난 3월 27일 하노이 타이 하 성당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미사. 약 1000여명의 베트남인이 참석했다.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3월 27일 하노이 타이 하 성당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미사. 약 1000여명의 베트남인이 참석했다.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베트남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러시아가 큰집 사촌이라면 우크라이나는 작은집 사촌이다. 둘이 싸움을 시작했다. 어느 편도 들기 어렵다. 지난 3월 2일 유엔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안에 베트남은 기권표를 던졌다. 베트남 정부는 “관련 당사자들이 서로 자제하고 유엔 헌장과 국제사회의 기본 원칙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 정도의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수십년 동안 전쟁을 겪은 베트남인들은 우크라이나 시민이 러시아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과 전쟁 공포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미국과의 전쟁이 1975년에 끝나고,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으니 40대 후반 이상 수천만명의 베트남 국민한테는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특히 베트남 거주 중국 화교들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한 중국의 논리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거주 러시아인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군사작전’을 벌인다는 러시아의 논리와 같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처럼 현재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언제든지 베트남을 침공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중국’ ‘우크라이나=베트남’이라는 인식이 형성돼 베트남 사람들은 러시아를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을 베트남 정부가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아 중국에 장차 베트남을 침공할 명분을 줬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온다.

지난 3월 5일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개최된 평화기원 바자회 모습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3월 5일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개최된 평화기원 바자회 모습 / 주베트남 우크라이나 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옛 친구 러시아와 새 친구 미국

베트남이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가까이 지낸 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 뼛속까지 반중 국가인 베트남은 중국과 앙숙 관계인 러시아를 적극 활용했다. 1969년 3월 소련군 300여명, 중국군 1000여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상처를 입은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소련이 핵 공격을 통한 전면전까지 계획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중소 국경분쟁을 놓고 베트남이 소련을 지지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이후 중국은 1978년 12월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며 러시아와 베트남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중국은 미국과 수교를 맺자마자 1979년 2월 베트남을 침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의 새로운 우방이 생겼는데, 바로 미국이었다.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서 미국의 베트남 끌어안기가 매우 적극적이다. 베트남 역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노골적인 영토분쟁에 맞서기 위해 미 항공모함을 베트남 다낭에 입항하게 하는 등 급속도로 미국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대륙에서는 오래전부터 러시아가 중국을 견제하고 남중국해에서는 이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형국이다.

미국은 베트남이 중국과 맞설 수 있도록 해안순시선과 고속정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패닉상태에 빠진 베트남에 2600만도스의 코로나19 백신을 공급한 최우방국이다. 경제적으로도 베트남의 최대 수출국은 미국으로 2021년 956억달러(약 116조원)를 수출했다. 베트남은 전 세계 4위의 대미 흑자 국가다. 미중 갈등 속에 베트남이 중국을 대신하는 생산기지가 되도록 전 세계에 홍보한 것 역시 미국이었다.

2019년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무역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데 미국과 EU가 러시아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으니 베트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은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로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중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든든한 군사적 후원자인 러시아가 중국과 가까워지는 건 베트남을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오랜 우방끼리의 갈등에다 새로운 우방까지 가세하며 복잡한 국제정세가 펼쳐지고 있다. 베트남으로선 잠 못 드는 날의 연속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베트남만큼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들 사이 복잡한 갈등의 실타래를 풀어줄 수 있는 나라가 베트남일 수도 있다.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자신들의 평화와 번영을 지켜온, ‘줄타기의 달인’ 베트남의 외교력을 기대해본다.

<유영국 「왜 베트남 시장인가」의 저자>

우리가 모르는 베트남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