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의민주주의의 한계 보완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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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대의민주주의에 기초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는 사회학적 개념으로서 ‘신탁(信託)’과 ‘대리’의 의미를 가진다. 신탁으로서의 대표 개념으로 ‘지적으로 또 관리 능력이 뛰어난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다른 말로는 엘리트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의 활동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그들만의 정치에 ‘동의’하는 선거로 제한됐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부인하거나 승인할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지적한 조지프 슘페터를 비롯해 많은 선각자가 통찰했듯이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10일 새벽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10일 새벽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한국행정연구원이 매년 하는 군, 검·경, 정부부처 등 16개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2013년 이후 2020년까지 압도적 꼴등은 국회다. 2020년 조사에서 1등인 ‘의료계’의 신뢰도가 71.7%였지만 ‘국회’는 21.1%에 불과했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정치인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배신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한 국민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로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안 등의 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지방 차원에서 지방의회 의원들이나 지방자치단체장들에 주민소환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들은 한국을 비롯해 상당히 많지만,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프랑스나 미국, 독일 등에서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가 차원의 국민소환제도는 시행하지 않고 있다. 영국에서 2015년 하원의원들을 대상으로 의회 의원소환제를 제정했지만, 이마저 정책 활동이 아닌 범죄 행위에 대한 것이라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장치로 보기가 어렵다. 대통령이 헌법·법률상 위법행위를 심하게 저지르면 탄핵의 대상이 되지만,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은 소환제와 탄핵 어디에도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국민소환제를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 또한 일리가 있지만,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신뢰할 수 없는 대표자들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대안을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다.

2009년 헌법재판소는 직접민주제의 도입에 관한 가이드라인으로 대의제와 직접민주제의 이념적 차이를 인정하나 대의제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직접민주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학계에서도 이 둘의 조화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러셀 J. 달톤 미 캘리포니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위시한 여러 학자가 대의제와 직접민주제의 병존과 상호보완 관계를 낙관한다. 달톤은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인 정통성 문제를 건드려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고, 시민의 정치적 대화를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발안제

국민발안제란 국민(일정 수의 유권자)이 법률의 제정이나 헌법의 개정 등을 주창하고 발의할 수 있는 제도를 뜻한다. 국민이 법률 절차에 의해 의제설정권 및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진정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제도다. 나아가 주권자와 통치자가 동일체여야 한다는 자기 통치원리를 충족하는 이상적인 제도로 평가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2017년 8월 17일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이해 청와대 홈페이지를 ‘국민소통플랫폼’으로 개편하면서 시행됐다. 국민 누구나 100명의 사전동의를 받으면 청원을 등록할 수 있고, 30일 이내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정부나 청와대 관계자가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시민참여’ 창구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권한은 입법부에 있어 청와대와 관계자의 답변은 “검토하겠다”에 그칠 뿐이었다.

입법부·사법부 관할 사안조차 청와대로 향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결국 국민청원은 국민과 대표자 간의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촉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제도의 실효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2020년 1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민발안개헌연대 창립식 모습 / 이상훈 기자

지난 2020년 1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민발안개헌연대 창립식 모습 / 이상훈 기자

2018년 3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문 대통령은 개헌안 제56조를 신설해 “국민은 법률안을 발의할 수 있다. 발의의 요건과 절차 등 구체적인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규정했다. 국민발안제 도입 의도와 관련해선 주권자인 국민의 권한을 강화해 직접민주제를 대폭 확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국민발안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대통령과 국회에 귀속된 헌법 개정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률에 대한 국민발안제도다. 문 정부의 개헌안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는데, 1954년 헌법에서 헌법의 국민발안제만 규정한 적이 있었기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포괄적인 입법권을 인정한 시도였다. 그럼에도 국민발안제 반대 의견이 55.7%에 달했다. 소위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선동적인 뉴스가 시선을 끄는 미디어 행태,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 등의 사회상황을 고려할 때 특정 집단의 정치적 선전수단으로 오남용될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국민발안제를 도입하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을 명확히 설정해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첫째, 국민이 발안할 수 있도록 하되 국회가 수정 의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발안제의 오남용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다. 국민의 법률 제정, 개정, 폐지 요구권을 보장하되 국회의 검수와 숙의 과정을 통해 제도의 부정 사용 및 과잉대표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둘째, 연 2회 등 정기적으로 국민발안제를 운용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정기적 발안은 국민의 참여를 보장해 제도적 안정성과 충분한 숙의 시간을 확보한다. 셋째,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를 연계해야 한다. 현행 국민투표 제도는 대통령 또는 국회가 회부한 헌법 개정안과 정책을 놓고 찬반투표만 하게 돼 있다. 국민에 의한 표결은 표면적으로 직접민주제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국민 스스로가 추구하는 정책과 법률안을 두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직접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국민투표와 국민발안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도록 보완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3월 10일 새벽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20대 대통령 선거 패배 선언을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3월 10일 새벽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20대 대통령 선거 패배 선언을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추첨제

추첨제는 참여 대표성과 객관성을 기하고자 대표자들을 무작위로 선발하는 방식이다. 의사결정 및 정책추진 과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국민 모두에게 보장한다는 점이 추첨이 가지는 민주적 성격의 핵심이다. 또한 누구나 동일한 수학적 확률을 가지면서도 전체 모집단을 가장 편견 없이 집락(cluster)할 수 있는 특징을 띤다. 성, 연령, 지역, 학력, 계층별로 선발이 가능해 비례성과 대표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 사회에선 국민참여재판제도(배심제)라는 이름으로 추첨제를 활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2008년 사법 영역에 민주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제도를 확립하고자 시행했다.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발한 배심원들이 재판과정에 참여해 재판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인다. 또 일반 시민에게 공공 사안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해 참여의식과 책임감을 고취한다는 순기능으로 주목받는다.

‘민주주의=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가 기획한 고정관념을 탈피해 더 많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추첨제는 우리가 직면한 대의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로서 연구가 이뤄졌다. 학자들은 추첨제의 기원에 집중해 아테네 민주주의 사례 연구를 통해 민주주의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추첨제는 관직을 원하는 사람들이 통치자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확률을 동일하게 보장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공직자의 성격에 따라 선출 방식으로 선거와 추첨을 병행했다. 공직자들은 임기 중 민회와 민중법원의 감시를 받았으며, 유사시 시민은 그들의 책임을 물어 탄핵할 수 있도록 했다. 임기가 끝나면 결산보고서를 필수로 제출토록 했다. 지원하기 전에 자기 검열과정을 갖도록 하며, 대표자로서 책임감 있는 업무 수행을 요구하기 위해 이러한 요건을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자투표 관련 이미지 / 경향신문 자료

전자투표 관련 이미지 / 경향신문 자료

역사적 경험으로 증명된 추첨제는 현대에도 민주주의 이념에 가장 가까운 제도로 평가받는다. 최근 학계에서는 행정적으로 가능한 최소 단위(마을)에서 추첨제를 시범 적용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주민들의 일상과 관련된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 방안의 하나로 지방분권을 논의 중이기도 하다. 추첨을 통해 대표로 선택된 일반 주민들이 해당 공동체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대표하는 공동체의 공간적 범위와 본인 삶의 공간이 일치하는 게 좋다. 나아가 추첨제 활용의 단위를 넓힐수록 대표자 임기 설정의 중요성이 커진다. 기초의회 의원을 추첨으로 뽑는다면, 임기를 2년이나 3년으로 해야 한다. 많은 시민이 대표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 정치적 다양성을 꾀하고 정치권력의 독점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안치용 ESG연구소장은 “국회의원의 일정 비율을 추첨제로 충원하거나 양원제를 채택해 하원을 아예 추첨제 의원으로 구성하는 등 전면적 정치개혁이 불가능하리란 법이 없다”며 “금권세력과 결합한 정치엘리트 집단의 기득권 수호 논리가 소위 정치학자라는 사람들을 통해 추첨제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 기술발전에 따라 대리의 근거로 지적된 규모의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자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민주주의 정체의 혁신을 말한다. 최근 ICT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4차 산업혁명 기술인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블록체인, 사물인터넷(IoT)이 보편화함에 따라 전자민주주의가 새로운 민주주의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인터넷 환경의 상호작용성·개방성·접근성을 고려할 때 공론장의 활성화, 정부 투명성 제고, 시민의 정책참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적 기술로 평가받는다. 현행 민주주의에 기술만 접목한다고 대의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고 시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술을 설계해 실질적인 정치과정에서 혁신을 주도했을 때 비로소 기술이 유익하다고 하겠다.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기술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뉴질랜드의 루미오(Loomio), 프랑스 파리의 시민참여 예산 플랫폼(Budget-participatif.paris.fr), 그리고 스페인의 엔보트(nVotes)가 있다. 루미오는 협력적 의사결정 플랫폼으로 토론 발제자가 의안을 설정하면, 오픈소스를 통해 토론 참여자들 누구나 직접 참여가 가능하고 누구나 데이터를 개량할 수 있다. 또한 이 플랫폼의 참여자들은 그래프와 도표 등을 통해 토론을 시각화할 수 있다. 명확한 표현을 가능케 하여 민주적 의지 형성 과정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의에 참여할 수 있는 참가자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이견 조율 과정을 거친 후 투표에 참여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도출한다. 개개인의 의견이 집단적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플랫폼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프랑스 파리는 2014년 9월 ‘시민참여 예산제’를 도입해 시민이 시의 예산 중 5%의 용도를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주요 정책 과정과 정치적 선택에서 시민이 소외되는 문제를 해소하고, 공공의 신뢰도를 회복하고자 직접민주주의를 장려했다. 엔보트는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투표시스템으로,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정당 등에서 활발히 사용하고 있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은 시민의 의사를 선호(preference)별로 파악·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다중투표, 선호반영(순서 매김), 선택사항 위임 등 각기 상황에 따라 섬세하게 투표 방식을 설계할 수 있다. 이로써 사장되는 소수의 의견을 재고할 수 있으며, 단순 찬성 반대가 아닌 별개의 다양한 의견까지 취합해 심의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송경재 상지대학교 교수는 “다양한 시민참여 공간을 더욱 확대해야 하고, 직접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민의 권능을 강화해야 한다. 정보를 가진(informed) 시민의 단계를 넘어 통찰력(insightful) 있는 시민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전자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시민의 역량이 더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민주주의를 뜻하는 단어 ‘e-Democracy’ 중 ‘e’는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직접민주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본질은 ‘Democracy’다. 민주주의의 혁신을 외치는 목적은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시민이다. 다른 행동, 다른 말, 다른 생각을 보장해야 하며,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시민사회에 있다. 우리에겐 새로운 민주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종국에 민주를 다시 확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공동기획 주간경향·ESG연구소· (사)ESG코리아·감신대 생명과평화연구소>

※이번 호로 지면 연재를 마칩니다. 온라인 연재는 계속됩니다.

<청년ESG프로젝트팀 현경주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학년·소진영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박상혁 경희대 프랑스어학과 4학년 ESG연구소 안치용 소장·이윤진 연구위원>

청년이 외친다, ESG 나와라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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