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를 위한 배려, 모두를 위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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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로널드 메이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가 처음 제안한 유니버설디자인은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의미한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특수 시설 설치와 공간조성에 따른 부가적인 비용과 문제점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시작했다. 현재는 나이, 성, 국적, 장애의 유무 등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 건축, 환경, 서비스, 도시환경 그리고 사회제도 등 폭넓은 영역의 디자인을 가리킨다. 2006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에 따르면 유니버설디자인은 “별도의 개조나 특별한 디자인 없이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 환경, 프로그램, 서비스 디자인”이다.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가 공개한 리모델링 공중화장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가 공개한 리모델링 공중화장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니버설디자인과 쓰임이 비슷한 말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포괄적 디자인(Inclusive Design)’ 등이 있다. 뚜렷한 의미 차이는 없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BF·무장애)는 조금 다르다. 휠체어 이용자나 시각장애인 등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물리적·심리적·제도적 장벽(barrier)을 제거(free)함으로써 모두가 쾌적하고 안전하게 활동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개념이다.

상위법 없는 지자체의 조례 국토교통부와 보건복지부가 유니버설디자인의 개념을 배리어프리, 즉 장애인 복지를 위한 시설의 편의성과 안전성 개선에 중점을 둬 정책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지방자치단체들이 점차 관련 조례를 제정하거나 가이드라인, 매뉴얼 등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가장 선도적으로 유니버설디자인 체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2007년에 ‘공공디자인 가이드라인’ 제정을 시작으로 2010~2013년 ‘복지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개발했고, 2016년에 ‘유니버설디자인 도시조성 기본 조례’를 제정했다. 이후 2017년에 262쪽 분량에 이르는 ‘유니버설디자인 통합 가이드라인’을 발행하고, 2021년부터 공공건축물 및 시설물 신축 또는 증·개축 시에 의무적으로 적용토록 하고 있다.

이외에 경기도 등 많은 지자체가 2010년대 들어 조례 등을 제정하고 있지만, 유니버설디자인의 모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의 상위법을 바탕으로 각 지자체가 상황을 고려해 제정하는 게 보통인 조례의 일반적 특성에 반해 국내 유니버설디자인 조례들은 상위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제정됐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2022년 1월이 돼서야 유니버설디자인 기본법을 국회에서 발의했다.

서울 중구 문화역 서울284에서 어린이들이 유니버설디자인으로 개선된 교통 안전 시설물을 체험하고 있다. 신호등 배치 위치의 조정을 통한 정지선 준수 유도로 실질적인 교통사고 발생이 감소한 사례다. / 이상훈 기자

서울 중구 문화역 서울284에서 어린이들이 유니버설디자인으로 개선된 교통 안전 시설물을 체험하고 있다. 신호등 배치 위치의 조정을 통한 정지선 준수 유도로 실질적인 교통사고 발생이 감소한 사례다. / 이상훈 기자

노르웨이와 미국의 운영 형태 해외에서는 공공디자인의 주요 목적이 단순한 시설 개선이 아닌 국민 삶의 만족도 향상으로 목표가 변화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유니버설디자인 노르웨이 2025’ 정책을 통해 국민 누구에게나 접근성이 뛰어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장기적 정책을 발표했다. ‘반 차별 및 접근성 법(The Anti-Discrimination and Accessibility Act)’과 건축계획법(Planning and Building Act)을 기반으로 ‘유니버설디자인 노르웨이 2025’의 목표와 전략을 구성했다.

노르웨이 아동 및 양성평등부 주관하에 16개 정부 부처의 정책 영역 전반에 걸쳐 건축, 교통, 야외공간계획, 정보통신기술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단계별 추진전략을 수립했다. 노르웨이는 세부 영역 기본계획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유니버설디자인 국가기본계획에 따라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상호 협력한다. 지자체는 유니버설디자인의 실행을 위한 의사결정과 예산집행 등의 권한을 중앙정부로부터 많이 위임받았다. 예를 들어 지자체는 건축물과 야외 공간, 교통 등의 영역에서 중앙정부와 함께 유니버설디자인 측정 지표 구축, 유니버설디자인 기준 개발, 유니버설디자인의 체계화의 세가지 법안을 만들어 표준화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 참여했다.

미국은 1990년 장애인법을 도입하고 난 후 장애인의 인권보장 및 편의 제고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용, 정부 활동, 대중교통과 공공시설 이용 등에 있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을 금지하고자 했다. 특히 장애인의 이용이 편리하도록 건축물 건·개축 기준을 규정했고, 통신 사업자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 인간의 통신을 위한 중계 서비스를 24시간 제공하도록 했다. 미국 제도의 지향은 고용, 행정서비스, 공공건물 등의 시설 설치기준 일원화다.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음식점이나 카페 등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는 키오스크는 운용상의 효율로 그 사용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주세다. 외식 산업 중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키오스크 채택이 늘어 최근 도입률이 롯데리아 80%, 맥도날드 70%에 달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매장의 키오스크 이용 주문은 매장 내 주문의 약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키오스크가 제품 특성상 신체적으로 제약이 있는 여러 사용자를 두루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시각장애인이 2020년 기준 25만명을 상회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 인구의 약 0.5%가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셈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거나 신체적 장애가 있어 키오스크와 높이가 맞지 않는 사람, 새로운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키오스크 사용에 제약을 느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18년 서울 중구 대한극장에서 열린 ‘배리어프리 스마트폰 자막·화면해설 기기 시연회’에 참여한 청각장애인이 영화관람을 도와주는 앱을 이용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지난 2018년 서울 중구 대한극장에서 열린 ‘배리어프리 스마트폰 자막·화면해설 기기 시연회’에 참여한 청각장애인이 영화관람을 도와주는 앱을 이용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키오스크 전문업체 엘토브와 협력해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은 물론 노인과 어린이까지 사용하기 편리한 키오스크를 개발했다. 엘토브에서 개발한 키오스크는 장애 유형별로 모드를 따로 구동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각을 선택하면 키오스크에서 나오는 정보가 바로 점자로 표시된다. 저시력자들을 위해 화면과 키패드가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표시돼 나온다. 청각을 선택하면 화면의 아바타가 수어로 안내를 시작한다. 현재까지 이 키오스크는 독립기념관이나 전남대병원, 수원시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 보급했고, 향후 프랜차이즈 매장의 주문용으로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국내 사회적기업 닷(Dot) 또한 점자를 표시하는 특허 기술을 손목시계 ‘닷 워치’, 교육용 촉각 표시장치 ‘닷 패드’에 차례로 적용하고 같은 기술을 키오스크에 확대했다. 닷의 점자 키오스크는 2020년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에 시범 설치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데 힘입어 2023년까지 부산지하철 전역에 설치할 예정이다. 서울 강남구청, 전북 남원시청, 국립고궁박물관 등에도 닷의 키오스크를 설치했다.

장애인의 무인 단말기 접근성을 보장하는 ‘공공 단말기 접근성 가이드라인’(2016년 제정)은 단말기의 설계·제작 과정에서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시각적 콘텐츠는 동등한 청각 정보와 함께 제공돼야 한다”고 명시하지만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법적 구속력이 없어 현실에서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2021년에 정부는 ‘공공 단말기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개편한 ‘무인 정보단말기 접근성 지침’을 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IT제품 규정에서 한국 상황에 맞는 부분을 뽑아 적용한 이 지침은 휠체어 이용자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높이를 낮추고, 노인이나 시각장애인들이 식별하기 쉽도록 글자 크기를 키우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카드 투입구에 달리는 받침대, 음성안내의 크기와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 노인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 사용 등 세부적으로 다양한 사항을 고려했다. 이번 지침 역시 법적 강제력은 없다는 점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모두를 위한 놀이터 2016년 1월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안에 조성한 통합놀이터 ‘꿈틀꿈틀 놀이터’는 그 기획 의도뿐 아니라 추진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꿈틀꿈틀 놀이터’는 국내 첫 통합놀이터로, 휠체어를 탄 어린이들이 놀이터에 접근해 놀이기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기존 ‘장애인 전용 놀이터’와 달리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게 특징이다. 예컨대 컵그네를 설치해 비장애 아동, 보행장애 아동, 시각장애 아동들이 모두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비장애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다면 장애 어린이들도 동일하게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통합놀이터가 추구하는 사회통합의 개념이다.

한국에 이 같은 무장애 통합놀이터는 전국 놀이터 4만2973곳 중 10여곳에 불과하다. 그마저 주로 대기업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아동을 위한 통합놀이터로 만들었다. 어린이 놀이터와 관련한 설치법규에는 따로 장애아동을 위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도시공원법에 간단하게 장애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신체장애인의 이용에 지장이 없는 구조로 할 것, 혹은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내용만 제시한다. 이에 따라 휠체어를 탄 채 탈 수 있는 그네는 장애인용 놀이기구에 관한 기준이 없어 안전 인증을 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철거하거나 재설치했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의 원형무대에서 공연된 ‘배리어 프리’ 연극 <묵적지수> / 남산예술센터 제공

서울 남산예술센터의 원형무대에서 공연된 ‘배리어 프리’ 연극 <묵적지수> / 남산예술센터 제공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을 넘어 노인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유니버설 놀이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지만, 외국에서는 노인 놀이터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고령화 사회가 다가오면서 노인의 생활 반경 안에 휴식 및 여가 공간을 조성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노인 전용 놀이터나 여러 연령대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세대 문화공간, 나이나 장애 여부 등과 관계없이 모두가 이용하는 유니버설 놀이터 등의 형태로 구체화하고 있다. 노인 전용 운동기구를 설치한 노인 놀이터는 노인의 신체 상태에 최적화한 시설물로 구성한다. 균형성·유연성·민첩성·근력 증진에 초점을 맞춰 설계하고, 그러면서도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사회적 유대관계, 여가 활동과 참여 등을 강화하는 기능을 모색한다.

사실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유니버설디자인은 생활 속에 얼마간 이미 녹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장실 비데, 아래로 돌려 여는 막대형 문손잡이, 냉온수를 하나의 손잡이로 합친 레버식 수도꼭지, 손을 가까이 갖다 대면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 광감지식 수도꼭지 등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 통합 가이드라인’에서 규정한 공중화장실 기준은 모두 유니버설디자인에 해당한다.

모두에게 더 큰 효율을 의미하진 않는다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한 건물 및 실내를 설계하는 하나무설계소의 최하나 소장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유니버설디자인은 없다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다수에게 당연한 사회 장치들이 소수의 사람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문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과 약자를 위한 시설은 ‘사회적 인프라’로 구축해야 한다”며 “다수의 세금을 소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기에 이러한 투자는 합리적 관점이 아니라 배려 차원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니라 소수의 사람도 ‘반드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최 소장은 “합의 가능한 경제적 투자와 감수 가능한 다수의 물리적 배려가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적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은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제품 마련에 훨씬 더 큰 비용을 들이며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 유니버설디자인은 디자인 계획과 설정 초기부터 여러 사회적 요구와 어려움을 수용함으로써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을 막는다. 사회 전체로 보면 더 경제적일 수 있다. 고령층을 포함한 소외계층 및 사회적 약자들은 기본적인 소득보장, 질병에 따른 보호를 위한 의료보장, 일자리 확보를 위한 고용보장 등을 국가와 사회에 요구한다. 이때 고령자들을 포함한 사회적 소외 혹은 취약계층부터 평균적인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하면 고령층, 장애인, 아동 등 사회 취약계층의 전반적인 복지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다. 유니버설디자인을 통해 환경적 제약이 사라져 더욱더 많은 사람을 교육하고 고용해 사회 참여율을 높인다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유니버설디자인은 경제적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유효하다. 특정 사용자층을 별도로 고려해 설계한 디자인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수 있게끔 설계한 디자인은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비용과 운영 측면에서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안치용 ESG연구소장은 “다양한 영역의 고객을 유치해 기업은 기존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사회는 경제적 투자 대비 더 큰 사회적 가치를 얻을 수 있다”며 “ESG 사회 관점에서 또 장기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유니버설디자인의 확대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라고 말했다.

<공동기획 주간경향·ESG연구소·(사)ESG코리아·감신대 생명과평화연구소>

<청년ESG프로젝트팀 노희원 연세대 신학과 4학년· 손채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현예린 연세대 지속개발협력학과 4학년/ESG연구소 안치용 소장·이윤진 연구위원>

청년이 외친다, ESG 나와라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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