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우리 회사는 최저시급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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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처럼 지낸 겨울이 끝나갈 무렵, 홀쭉해진 몸에 잔근육이 오돌토돌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머릿속은 시냇물 흘러가듯 고요하고 차분했다. 그 시절 생활은 반 자연인에 가까웠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차가운 방에서 운동으로 몸을 데우며 책이나 팟캐스트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차곡차곡 알아갔다. 대학 졸업을 앞둔 친구들이 스팩을 쌓으려 전쟁 치를 때, 나는 이력 한줄 남지 않는 혼자만의 전투에 골몰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경남 양산에서의 생활은 뜬금없이 끝이 났다. 어머니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가난도 모자라 가족의 우환이라니, 너무 인간극장 같아 화낼 여력도 없었다. 가까스로 생명줄만 붙여놨던 정신의 바이털 사인(vital sign)이 톡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와중에도 병원비를 대기 위해선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샌 몸으로 회사에 출근해 실장님이 지시한 일을 처리하는데, 기밀 테스트 부서의 왕고 영감님이 탱크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실장님 지시라고 말을 해도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더니 급기야 쌍욕까지 하는 게 아닌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치겠다, 치겠어”라며 이죽대는 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멀쩡했던 놈이 갑자기 둔해지니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다. 한 번은 기압이 가득 찬 탱크를 건드렸다가 샴페인 마개처럼 솟구치는 쇳덩어리에 맞아죽을 뻔했다. 이랬다간 가뜩이나 높은 산재 사망률에 몸소 기여할 듯했다. 입사 5개월 만에 사직서 위에 볼펜 촉을 얹었다.

면접 본 시간도 아까운 회사들

기껏 잡은 회사를 등진 내겐 가혹한 방랑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원으로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용접 일자리를 구했지만 조건 맞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취업사이트에 올라온 회사도 대부분 창원 대산면이나 진북면처럼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어달 이력서만 스무개는 던졌을 때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팔용공단에 입주한 중소기업이라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정말 나쁜 쪽으로 상상 이상의 회사였다. 출근 첫날, 근로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작업복과 안전화부터 받았다. 딱 봐도 새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일이 힘들어 도망갔던 사람이 받았던 물건을 세탁해 준 것이었다. 사장은 작업장에 날 데려다놓더니 “다 할 줄 알제?”라며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찬밥 더운밥 취사선택할 처지가 아니었던지라 묵묵히 일하다가 화장실로 갔다. 아뿔싸! 해우소가 흡사 재난영화 세트장 같은 몰골이었다. 창문은 깨진 채 방치됐고, 소변기는 물이 내려가지 않아 찌든 때가 껴 있었다. 그래도 참고 퇴근시간까지 버텼는데, 첫날부터 3시간 잔업을 시켰다. “토요일 나와야 한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일할 곳이 아니다 싶어 사흘 만에 퇴사를 통보했다. 그때까지 근로계약서는 써보지도 못했다.

다시 면접을 봤다. 이번엔 꽤 규모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통근버스와 도서관, 보육시설까지 갖춘 괜찮은 회사였다. 쓸데없이 대기시간이 길어 1시간 내내 회사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현장 담당자가 왔고, 이번엔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 기량 테스트 때 모든 역량을 다했다. 담당자의 극찬 속에 계약서를 쓰러 사무실로 올라간 나는 곧 할 말을 잃었다. 상무라는 사람이 와서 책상 위 서류더미를 툭툭 두들기며 “우리 회사는 최저시급부터 시작합니다” 했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면접 보느라 날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또다시 구인구직 한달째, 마침내 제대로 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3년 후 또 한 번의 악연이 될 로템 하청업체였다. 입사하는 당일엔 그 거대한 공장 규모며 시설에 깜짝 놀랐다. 너무 넓어 공장 사이를 오갈 때 골프카를 타고 다녀야 했다. 매점과 병원, 샤워실, 운동장, 심지어 헬스장까지 있었다. 중년만 한가득했던 여타 현장들과 달리 나보다 젊은 직원도 많이 보였다. 일터 내부 분위기는 여유로웠다. 잔업이며 특근을 붙여 사람 짜내는 장기근무가 없는 탓이었다. 모든 공장은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사이좋게 불을 껐다. 실로 낯선 풍경이었다.

세 번째 구직도 실패

현대로템은 알루미늄 용접이 주였다. 이제껏 해왔던 용접보다 월등히 가벼운 느낌이었다. 불꽃 튀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중공업에 쓰이는 솔리드 와이어 용접이 둔탁하고 잔잔하다면, 알루미늄이 녹을 때 나는 소리는 매미가 우는 듯 높고 시끄러웠다. 필요한 직무 능력도 달랐다. 기존 일은 용접 결과물인 비드를 잘 뽑아내는 능력이 중요했다면, 이곳은 도면에 맞춰 올바른 부속을 부착하는 ‘제관’ 역량이 훨씬 중요했다. 내부 구조도 그만큼 복잡하고 정밀했다. 사실상 신입으로 입사한 셈이었다.

일주일 정도 연습한 다음 실전에 투입됐다. 사실상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도 많이 없는 시기라 분위기 파악에 전력을 다했다. 주변 또래들은 대부분 기술교육원이나 정직원 아들로 입사한 듯했다. 신입의 운명은 보통 3년차에 정직원 전환되는 소수와 회사를 나가는 다수의 길로 갈렸다. 운 좋게 10년차 왕고 형님의 연봉을 알게 됐는데 단번에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연봉은 오르지 않고, 나이가 차면 정직원 명찰은 멀어지고, 독점 업체라 배운 기술을 쓸 곳도 별로 없기에 하청에서 장기근속을 하면 제 살을 깎아먹는 꼴이 되는 구조였다.

사내엔 한창 북한과 분위기가 좋아 새로운 사업을 따리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나 역시 그 전망 덕분에 뽑힌 셈이었다. 회사 건물 곳곳에 북한과 철도연결을 바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사업이 잘 안 됐는지, 아니면 프로젝트가 엎어졌는지 좌우간 정확히 입사 한달 만에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사장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사직을 권고했다. 노동법으로 따지고 들면 붙어 볼 수야 있었겠지만, 애걸복걸하기 싫어 알겠다고 했다.

세 번째 구직에 실패해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잠들기만 반복하던 그때 의사선생님의 연락이 왔다. 바로 내일 어머니 암수술을 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병실 앞에서 멍하니 병원 천장만 바라보았다. 잇단 불운에 마음은 이미 쑥대밭이 된 채였다. 세상 모든 게 삐뚤어지게 보여 수술마저 잘 안 되리라 체념하고 있었다. 마침내 의사선생님이 병실에서 나왔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썹을 실룩이며. “수술 잘됐고, 어머니 잘 보살펴 드려라. 1년마다 정기검진하는 것 까먹지 말라”고 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알게 됐다. 눈물이란 꼭 슬플 때만 나지 않음을. 전원을 꺼놨던 휴대전화를 켜고 나흘 만에 다시 취업사이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시련을 이겨내리라. 타인만큼의 삶을 쟁취하고 말리라.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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