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기였다. 2016년 총선, 영원할 듯했던 권력의 가슴팍에 몰락의 신호탄이 꽂혔다. 단독 개헌선 운운하며 머릿속에서 별나라를 구상하던 새누리당은 패닉에 빠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용접을 하고 있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적응의 힘인지, 젊음의 힘인지 어느새 불량 감소와 생산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어느덧 정직원 아저씨들과 같은 개수를 칠 수 있게 됐다. 품질 또한 꿀리지 않았다. 변치 않는 건 오로지 월급뿐. 7000원이란 시급은 내 상황을 타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빚으로 한달 180만원이 빠져나갔다. 부업을 관둘 수 없어 퇴근해선 웹소설로 푼돈을 벌었다. 낙이라곤 없던 시절, 팍팍한 삶에 작은 볕뉘가 든 사건이 있었다. 입사 일년이 조금 지날 때쯤이었다. 1000만원을 빌려주었던 분이 절반만 받고 더 안 받기로 했다. 젊은 나이에 빚으로 고통받는 게 너무 마음 아프셨다고 했다. 그날 하루종일 울었다. 채무를 덜었다는 생각보다 세상에 온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부도 바뀌었는데 나만 그대로
유달리 더운 8월, 부스에 냉각설비가 없어 정말로 실신할 뻔했다. 사장님에게 야간근무를 요청했는데 다행히 한달간의 야간작업을 허락했다. 이때 많은 추억이 생겼다. 대다수가 퇴근한 어두운 공장의 고요함이 노동자라는 신분을 잊게 해줬다. 특히 야식 거른 채 ‘야리끼리(당일 할당량 일찍 끝내기)’를 쳐놓고 남은 시간 동안 쉴 때 너무도 행복했다. 책을 가져다 읽기도 하고, 네이버 소설 카페 회원들과 새벽 채팅도 하고, 컵라면 물 얹어놓은 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자유를 즐겼다. 특히 즐거웠던 일은 길고양이 관찰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목재공구함이 새끼고양이 둘의 집터가 돼 있었다. 곧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어미가 공구함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갔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나와 퍽 닮아 있었다.
주간근무로 전환한 얼마 후. 정유라의 입시비리가 터졌다. 탄핵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사장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언짢아졌다. 그해 겨울, 마침내 탄핵안이 가결됐다. 새싹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날 무렵, 이정미 헌재소장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역사에 남을 선고가 떨어졌다. 벚꽃이 모습을 감추고 포근한 온기가 불쾌한 습기로 변해가기 전, 마침내 대통령이 바뀔 때까지 나는 용접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입사한 지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출근해 같은 일만 반복하는 동안 힘든 감정은 차차 희석되고 출근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가슴속에 티끌만 하던 두려움의 부피 또한 부풀어 올랐다. 이 일만 해서 정년까지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출근했더니 부스에 다른 사람이 일하고 있는 꿈을 세 번쯤 꾼 것 같다. 옆 부스 영감님도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이 사업이 얼마 못 갈 것을 예상했다. 다만 나와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 용접사라는 기 떠돌이 신센기라.” 그 말을 듣고 한숨 쉬며 귀가한 그날,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니 입사 당시 날렵한 청년은 어디 가고 웬 배불뚝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해버린 내 마음이 몸에 고스란히 스며든 모습 같았다. 그래, 정부도 바뀌었는데 나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를 나가기로 했다. 있는 사람도 내보내야 했던 사장님은 내심 고마운 눈치로 사직서를 받아들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근무였는데, 긴급물량이 터져 토요일에 출근했다. 다 때워놓고 집에 가서 뻗어 있는데 낮에 전화가 걸려왔다. 본사 과장님이었다. 빨리 출근 안 하고 뭐하냐는 호통에 정신없이 출근하고 보니 미칠 듯이 억울했다. 일요일 출근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과장님은 내 퇴사 소식을 모르는 듯했다.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내일 나가는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그날 결국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 용접기를 집어던졌다. 과장한테 못 해먹겠다고 역정 내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능력껏 대우받는 즐거움
다음날, 2년간 알고 지낸 분들과 인사를 나누던 도중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파트장이 넌지시 말했다. 과장님한테 그냥 사과 한번 하라고 했다. “어차피 안 볼 얼굴 아입니꺼” 손사래를 치자 “어차피 안 볼끼라 생각하고 니가 함만 지주라. 낸주 우째 만날지 또 아나”라는 답이 돌아왔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안 볼 사이에 앙금 남겨 뭣하리. 쪽팔림을 무릅쓰고 사무실로 찾아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때 한번 자존심을 밟아 눌러놓아 뒤에 큰 덕을 봤다. 퇴사 이후, 내 후임자가 금방 나가버려 임시 일당직이 필요할 때 과장님이 날 추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일했던 회사에서 한달 반을 더 일하게 됐다. 다만 조건은 시급이 아니라 완성 제품 하나당 1만원. 내 기술로는 하루에 15개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일한 만큼 버는 쾌감을 몸소 느꼈다. 중소기업의 최저시급을 웃도는 임금은 일 잘해보려는 의지를 꺾는다. 암만 열심히 해도 임금이 오르질 않으니 눈치껏 적당히 일한다. 생산량이 많이 나올 리 없고 품질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일하는 만큼 받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신경이 온통 눈앞 제품에 쏠렸다. 1년 넘도록 넘지 못한 하루 15개의 벽을 그때 뚫었다.
일에 재미가 붙으니 군불만 지피던 다이어트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다. 몸이 무거우니 같은 일을 해도 훨씬 피곤했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잠들곤 했는데, 그때 잠들면 두어 시간 뒤에 깨버리고선 새벽 내내 뜬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 상태로 출근하면 악순환의 굴레가 주말까지 이어지곤 했다. 우선 통근버스에서 일찍 내려 집까지 달렸다. 혼술을 끊고 저녁 한끼는 샐러드와 바나나로 대체했다. 몸이 가벼워지자 근력운동도 병행했다. 어느새 정시에 잠들고 깨는 주기화에 익숙해졌다. 단지 능력껏 대우를 받는 사실 하나만으로 삶에 활기가 넘쳤다.
임시 일당직 계약기간이 끝나고야 비로소 20대 중반을 함께한 회사와 돌아섰다. 이럴 땐 보통 휴식기를 가지게 마련이지만 내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용접사의 숙명이 낭인이라면, 더 나이 먹기 전에 ‘타지 근무’의 느낌을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빚 때문에 멀리 나갈 방법은 없었다. 은행은 비자발적 신용불량자에게 보증금과 이사 비용 몇백조차 빌려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친구가 이사 가면서 양산에 집이 하나 비었다. 자취의 감을 익히기 절호의 기회였다. 용달차에 옷가지와 책 몇권만 싣고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두렵고 설렜다.
<천현우 용접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