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짬밥 무면 누구나 다 합니더. 조급해 마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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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에 온 지 일주일. 엄마가 보지 말았으면 하는 이야기.

내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대우를 제시받고 타지로 왔다. 아직도 내가 집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일요일 밤을 지내고 나면, 그나마 제일 행복했던 시기로 다시 돌아갈 것만 같다. 이런 유치한 바람에서 깨어나질 못한다는 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일까.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낯선 사람들이 있는 직장. 낯선 사람들이 머무르는 숙소. 익숙한 게 없는 장소에서 살아간다는 건 두렵다. 이럴 때면 군대를 가보지 않은 스스로를 다그쳐 본다. 너 빼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들 겪어본 일 아니냐. 그동안 넌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느냐.

더 나은 삶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진 못하겠다. 아직 나는 어른의 처세를 모른다. 혼잣말과 한숨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인 걸 알면서도 내뱉고, 독한 술 한 잔에 하루를 씻어내지 못해 퇴근길에 홀로 속을 삭인다.

이런 날도 일상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아지겠지. 지금은 그 날을 기다려보자.(2017년 8월 27일 페이스북 글)

업무 난이도 별 다섯개

경남 양산으로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회사 면접이 끝난 후였다. 사장님이 직접 통화를 해서 임금 이야기부터 본인의 생각까지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다. 그간 사람을 부품 취급하는 게 눈에 보이던 사장들과 너무도 다른 태도였다. 비록 어머니 건강문제로 오래 일하진 못했지만 참 기억에 많이 남은 회사였다. 그만큼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고, 힘든 만큼 내면적으로 많이 성장한 시기였다.

처음으로 차를 타지 않고 회사로 출근했다. 숙소에서 나와 20분을 가볍게 조깅하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석산리와 물금읍 사이에 놓인 금오대교를 달려 출퇴근하는 시간은 잡념을 없애는 과정이었다. 출근의 두려움을 떨치고, 퇴근의 고단함을 내버리는 그 순간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를 이은 통로를 달리는 과정 같았다.

이번 회사는 ISO 탱크 컨테이너 정비업체였다. 민감한 화학 액체를 운송하는 장비였기에 업무 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었다. 액체가 새지 않도록 점검하는 기밀 테스트 부서. 화학물질로 오염된 통 내부를 세척하는 부서. 배에 실을 수 있는 상태로 컨테이너를 보수하는 수리 부서. 컨테이너 주들에게 견적을 주고받는 사무 부서. 내 업무는 컨테이너 수리였다. 업무 난이도는 그야말로 별 다섯개. ‘머리 아프고 몸도 빡센’ 일이었다. 병역특례 시절의 앉아서 기판 들여다보며 하던 수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온갖 종류의 고장이 있었고, 변수에 대응하기 위한 온갖 잡기가 필요했다. 용접부터 절단, 사상, 실링, 리베팅, 해머링, 페인팅, 누수 탐지 등 업무를 전부 꿰려면 10년을 배워도 모자랄 듯했다. 우리 팀은 총 4명이었는데, 팀장 형님은 대졸 후 설계 일 12년을 하다가 1년 전에 이 업계로 오신 분이었다. 현장에서 거의 본 적 없는 합리적인 인간상이었다. 야단칠 때도 “이 부분만큼은 한마디 해야겠다”며 쓸데없는 감정을 넣지 않았다. 내 맞선임이자 연하인 ‘김 기사’는 투덜이였지만 일을 펑크 내거나 실수를 면피하는 비겁자는 아니었다. 서로 취향 맞는 지점이 많아 자주 술을 마셨다.

마지막으로 필리핀 노동자 가브리엘 큰형님은 회사에서 가장 골병드는 업무, ‘폴리싱’의 달인이었다. 일 자체를 문자로 옮기면 무척 심플했다. 대형 그라인더를 들고 컨테이너 밖과 안을 긁어 깨끗하게 만들면 끝이었다. 늘 그렇듯 실무에 부딪히자마자 온갖 난관이 존재했다. 바깥 부분을 긁어낼 땐 파브르가 된 심정이었다. 세척 약품을 치자 사탕에 꼬이는 개미 떼보다 더 많은 날벌레가 꼬였다. 그래도 이쪽은 차라리 나았다. 외관만 적당히 깨끗해 보이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안쪽. 내부를 긁어내려면 컨테이너 안으로 직접 들어가 벽을 일정한 결로 긁어내야 했다. 환기가 안 돼 쌓여가는 분진과 원통 안이라 한정된 자세로 그라인딩을 하다 보면 허리에 엄청난 부하가 실렸다.

“허리 아파 현우. 허리 조심.”

같이 폴리싱을 할 때마다 이 대사를 달고 살았던 가브리엘 형님은 필리핀에 있을 때 거친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쉰이 넘은 필리핀 노익장은 총을 좋아하는 ‘밀덕’이어서 그쪽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한국 밀덕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입에 올린 총 중 몇개는 직접 쏴봤다는 것. 고국에서 총격전 벌인 일화를 들을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다.

진정한 고수를 만나다

전임 팀장이 나가고 우리 팀은 평균 경력이 많이 부족했다. 당연히 일하다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퇴사하고 자기 회사를 차린 전임 팀장 덕분에 작업 기한을 펑크 내는 일은 없었다. 전임 팀장은 ‘빠꼼’ 그 자체였다. 나름 온갖 현장을 겪어왔지만, 아직도 그 팀장 수준의 역량을 가진 기술자를 못 봤다. 컨테이너의 분류, 회사마다 다른 규격, 안에 들어가는 부품과 위치가 다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 실력의 정점을 확인했던 순간은 팀 전체가 누수 탐지에 애먹던 때였다. 탱크에 물을 넣어 새는 곳을 찾아 용접을 해야 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선 컨테이너 외부를 절단해야 했다. 누수 지점을 잘못 예측하면 뜯어낸 외피를 다시 붙이는 데 긴 시간이 들었다. 즉 단번에 찾아내야 시간이 절약되는 구조였다. 그날은 불량이 제대로 잘못 걸려 컨테이너 반을 뜯어내는 동안 물이 새는 곳을 못 찾았다. 결국 회삿돈 써서 전임 팀장을 불렀는데, 골조에 청진기 몇 번 대더니 한 번에 누수 부위를 찾아내는 게 아닌가. 감탄하는 내게 팀장은 별일 아닌 듯 어깨 한쪽을 으쓱하더니 말했다.

“짬밥 무면 누구나 다 합니더. 조급해 마이소.”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연봉 8000만원을 제시받았던 특급 인력이었다. 임금 협상은 됐지만 실장급 직책을 달라는 조건을 거절당했고, 그걸 명분으로 회사를 나와 더 잘 나가고 있다고 했다. 어느 업계든 정점인 기술자는 회사에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구나. 그의 실력에 경이로움과 동경, 선망의 감정이 들었다. 하루하루 회사생활을 마치고 귀가하면, 방에 앉아 스스로를 어떻게 채워나갈까 고민했다. 빚을 해결하고 어머니께 생활비를 보내고 나면 내게 남은 생활비는 딱 20만원. 타지라는 환경과 최소한의 삶 속에서 내 감정은 시시각각 뒤틀리곤 했다. 현실의 지면에 나를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쉼 없이 내면을 망치질해야 했다. 명상을 하고 일기를 썼다. 달리기를 하고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했다. 일요일엔 도서관으로 달려가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고독을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해 가을. 유난히 혼자 소주를 많이 마셨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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