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내일도 사부지기 때아 보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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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30분, 오늘도 힘겹게 잔업을 마쳤다. 퇴근 카드를 찍고 후문을 나서면 불 꺼진 한국재료연구소가 보인다. 길을 건너 마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가장 빠르게 가는 108번 버스마저 12분 후에 도착. 뭔 놈의 버스가 이리 느긋한지, 한숨 쉴 기력조차 없어 조용히 벤치에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본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이 회사는 잔업 근무자를 위한 통근버스 따윈 없다. 휴게실도, 샤워실도 열어주지 않는다. 땀에 찌든 옷을 입은 채 걸레짝이 된 몸으로 버스에 오른다. 오늘따라 유달리 커플이 많다. 그러고 보니 연애를 못 해본 지 몇년이나 지났더라?

연인들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수그러든다.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 따윈 느낄 새도 없다. 버스 안 모든 승객이 기름내와 용접 흄 냄새 풍기는 나를 불쾌하게 여길 것 같아 불안하다. 2인 좌석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목을 기대는 동안, 만원버스임에도 옆에 누구도 앉지 않는 현실에서 예감은 확신이 돼간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누구도 던져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저 냉소로 회답한다. 넌 흙수저 주제에 노력도 하지 않았잖아?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행복하게 해달라는 게 그리 거창한 부탁인가?”(2015년 11월 일기)

한자리를 둘러싼 잔혹한 경쟁

‘인생’이라는 단어가 어떤 말 앞에 쓰일 땐 대게 인상 깊은 경험을 뜻한다. ‘인생 맛집’, ‘인생 여행’, ‘인생 독서’ 등. 주로 경험과 궁합이 잘 맞는 이 단어 ‘인생’은 언뜻 긍정의 느낌을 주지만, 사실 단어 자체는 철저히 중립에 가깝다. 인상 깊은 사건이 꼭 좋은 요소만 포함하진 않으니까.

2015년 5월 말, 처음 입사할 당시만 해도 첫 용접 직장이 내 ‘인생 회사’가 될 줄 몰랐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지금의 중공업 노동자들을 둘러싼 대다수 문제를 직접 겪거나 눈으로 보았다. 저임금, 고용 불안정, 하청과 원청, 노조 원청과 비노조 원청 간의 이중 갈등, 탐욕스러운 하청업체 사장, 저임금과 과노동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돌이켜보면 근로계약서를 쓸 때부터가 이상했다. 사장님은 3개월 동안 4대 보험을 들지 않는 대신 교육비 명목으로 월급에 30만원씩 더 얹어주기로 했다. 이유가 궁금했는데 퇴사한 지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정부에서 한창 일학습병행제로 지원금을 줬는데, 이걸 타먹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든 거였다. 덕분에 퇴사 후 창원 고용노동부까지 출석해 검사 앞에서 진술서를 써야 했다.

현장에 투입된 후에도 기묘한 상황은 계속됐다. 한명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두고 두명이 교육받아야 했다. 실적이 안 나오는 사람은 자동용접 라인으로 반출됐다. 합리를 가장한 잔혹한 경쟁이었다. 짝지이자 상대는 인도네시아 사람인 아짐존, 살갑게 구는 그와 달리 마냥 웃으며 대할 수가 없었다. 자동용접은 사실상 공장 라인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경력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직무였다. 이미 전공을 한 번 돌아온 나였기에 엉뚱한 곳에서 시간 허비할 틈이 없었다.

우리가 배운 일은 대형 트럭의 바퀴와 바퀴 사이를 잇는 차축을 용접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능숙하게 때울 리 없으니 교육담당관도 붙었다. 정년이 머지않은 원청 직원, 정확히는 ‘파트장’이라 불리는 ‘비노조 원청 직원’의 엄격한 지도로 일종의 경쟁을 했다. 다른 용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하우징’이라 불리는 원반 모양 부위가 말썽이었다. 차축을 고정시킨 기계를 회전시켜가며 때워야 했는데, 타이밍 조금만 어긋나도 용접물이 흘러내리거나 혹은 너무 쌓여 용접부가 뚱뚱해졌다. 용접하는 시간보다 용접 자국을 지우기 위한 화염 절단기와 그라인더를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달 꼬박 시행착오를 겪다 마침내 작업이 손에 좀 익을 때쯤 경쟁은 싱겁게 끝났다. 파트장은 아짐존을 자동용접 라인으로 보내버렸다. 실력 문제보다는 밉보였기 때문이다. 하필 2015년의 6월은 라마단 기간이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 아짐존은 전보다 업무 집중력이 떨어졌고, 기도하다 쉬는 시간을 몇분씩 넘겼다. 그땐 이주노동자 혐오라는 자각이 없었기에 아짐존이 혼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양해를 구하고, 점심시간 동안 못 한 몫을 채우겠다고 협상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파트장은 소통의 어려움을 감안하지 않고 사칙만 강요해 찍어눌렀고, 나는 침묵했다. 아무리 당시에 무지했다지만 비겁한 짓은 비겁한 짓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짐존이 좋아했던 빈땅맥주에 양꼬치를 대접하고 싶다.

오른쪽 약지가 휜 영감님

일을 전담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회사 돌아가는 현황이 보였다. 원청은 계속 불황이었기에 사업을 축소해 남은 물량을 전부 하청으로 외주를 주고 싶어했다. 자연스럽게 통일 중공업 시절부터 일해 왔던 원청 노동자는 눈엣가시였고, 분기마다 파트 단위로 유급휴가를 보냈다. 나와 같은 작업 파트가 휴가를 가면 지옥도가 펼쳐졌다. 매일 3시간씩 잔업을 해도 모자라 긴급물량이 터져 ‘24시간 철야’를 한 적도 있었다.

옆 부스의 영감님은 오른쪽 약지가 V자 모양으로 휘었다. 괴팍한 성격이라 평판이 나빴다. 곁에서 일하던 조수들이 전부 뛰쳐나가 늘 혼자 밤늦게까지 일하기 일쑤였다. 목소리도 까랑까랑했고, 말 역시 험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막상 같이 일해 보니 전혀 아니었다. 하던 말 계속하고, 화나면 목소리를 올릴지언정 감정을 담아두거나 장유유서에 찌든 사람이 아니었다. 우린 띠동갑 두바퀴 돌리는 나이 차임에도 절친한 직장 동료가 됐다. 영감님과 나는 잔업이 끝나면 늘 삼겹살을, 명태전을 먹으며 막걸리와 소주병을 비웠다.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영감님은 늘 똑같은 작별인사를 해 아직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내일도 사부지기 때아 보자이.”

용접사에게 죽음의 계절인 여름이 지나자 달력은 훌렁훌렁 넘어갔다. 9월에서 3월까지 반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파트장들의 독후감을 대필해준 일이었다. 자재가 다 떨어져 원청 공장으로 가니 머리를 앓고 있는 4명의 파트장이 보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회장님의 자서전을 붙들고 2000자 내외의 독후감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쇳밥 먹던 아저씨들이 갑자기 볼펜을 잡은들 글이 술술 나오겠는가. 원청 기업 회장님의 투철한 자부심과 거대한 자의식에 내심 놀라며 독후감을 대필해줬다. 그 사건을 계기로 파트장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직장생활이 훨씬 편해졌다. 이때만 해도 이 회사에서 10년은 너끈히 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천현우의 쇳밥일지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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