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광물자원협력은 남북 모두에 ‘윈윈’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를 하역하는 모습 / 한국골재협회 제공

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를 하역하는 모습 / 한국골재협회 제공

북한과의 경제협력사업에서 가장 기대되는 분야로 북한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한 제조업, 낙후된 인프라 건설을 위한 건설산업,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개발 등을 꼽는 사람이 많다. 북한은 일제강점기부터 풍부한 부존 광물자원을 기반으로 광공업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특히 중석, 몰리브덴, 마그네사이트, 흑연, 중정석, 운모, 형석, 금, 철, 연, 아연, 알루미늄, 석탄 등이 풍부하고 마그네사이트의 경우 전 세계 매장량의 약 50%를 갖고 있다. 또한 서한만 및 동한만 등에 약 500억배럴(북한 측 주장)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캐나다 등의 외국기업들이 탐사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지하자원에 대한 잠재적 가치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다. 북한의 지하자원 매장량이 세계적인 규모라는 주장과 과장됐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지하자원 매장량을 발표하지 않고, 지하자원 매장량 추정치도 편차가 크다. 하지만 매장량이 과장됐다고 하더라도 연간 수출액의 절반가량이 광물자원인 것을 보면 상당한 양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은 세계 5위 광물자원 수입국으로 광물 자급률이 극히 낮아 전체 광물 수입의존도는 88.4%에 이른다. 이에 비해 북한은 자원이 풍부하므로 광물자원협력은 남북 모두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북자원협력사업은 광산개발과 운송을 위한 교통망 구축을 위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 실제로 추진 사업은 많지 않다. 그동안 이루어진 대표적인 남북자원협력사업은 비교적 적은 투자로 사업이 가능했던 북한 모래와 석재반입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갈색 상의를 입은 경남대 임형준 교수가 북한 개성에서 작업자와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 임형준 교수가 개성 태림아리랑 석재공장에서 조각한 성모자상(사진 오른쪽). / 임형준 교수 제공

갈색 상의를 입은 경남대 임형준 교수가 북한 개성에서 작업자와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 임형준 교수가 개성 태림아리랑 석재공장에서 조각한 성모자상(사진 오른쪽). / 임형준 교수 제공

북한산 모래반입사업

광물자원협력은 다른 남북경협사업과 마찬가지로 2010년 5·24조치로 완전히 중단됐으며, 북한산 모래반입도 중단됐다. 북한산 모래는 2000년대 중반 국내에서 사용되는 건설용 골재의 30%를 차지한 적도 있어 반입중단은 건설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후반 200만호 주택건설사업의 영향으로 인건비와 자재비가 급등했다. 1990년대 초 북측과의 관계개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으므로 건설업계는 원가절감을 위해 북한산 시멘트, 철강, 석재, 모래 등의 수입을 검토했으나, 1994년 북핵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건설수요도 줄어들면서 추진되지 못했다.

건설자재 관련 협력사업은 2002년 북한 서해안에서 건설용 모래를 반입하면서 본격화됐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부터 바닷모래를 채취해 사용했다. 바닷모래는 강모래보다 채취비용이 높아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주택 200만호 건설 추진 후 골재 부족으로 인한 가격급증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바닷모래는 전체 모래수요량의 20%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환경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강모래 채취에 규제가 강화되면서 사용이 증가했다. 바닷모래 채취 증가로 해양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자 정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연안에서의 모래 채취를 제한하고 먼바다에서 채취하도록 했다. 먼바다의 수심이 깊은 곳에서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고가의 장비가 필요하고, 채취비용도 증가하는 문제가 있었다. 2000년부터 인천시 옹진군 주민들이 모래 채취를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2004년 7월 바닷모래 채취가 금지됐다. 결국 2003년 모래파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북한 모래반입의 주요 배경이 됐다.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된 모래반입

남북교류협력협회 자료에 따르면 북한 모래는 1992년 함경남도 함흥의 성천강에서 해상운송으로 1t이 반입된 것이 최초였으며, 1995년에는 상당한 규모가 반입됐다. 2002년에는 해주 앞바다 모래가 반입되기 시작했고,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반입됐다. 해주 앞바다 모래를 반입한 업체는 국양해운이었으며, 2004년에는 남북해운협정이 체결돼 있지 않아 제3국(홍콩·중국 등)의 해운회사를 통해 반입됐다.

태림산업 개성 레미콘 공장

태림산업 개성 레미콘 공장

2004년 6월부터는 개성시 판문군의 사천강 모래도 반입되기 시작했다. 골재채취업체인 ㈜씨에스글로벌이 북한 민경련 산하의 개선무역총회사와 모래반입 계약했으며, 계약기간은 30년이었다. 사천강은 분계선으로부터 불과 9㎞ 거리에 있었으므로 운송비 부담도 적었다. 2004년 6월 7일, 25t 트럭 15대 분량의 모래가 최초로 육로를 통해 반입됐다.

2004년, 해주 앞바다 모래반입이 2개월간 중단되기도 했다. 남측의 30여개 해운사가 북한산 모래반입을 위해 경쟁했고, 북한기관 간에도 실적 경쟁이 일어났다. 2004년 7월 모래반입이 중단됐다가 9월 재개됐다. 중단된 2개월간 북한은 모래사업 관련 기관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2004년 말에는 함흥(흥남) 앞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도 반입됐다. 모래 채취 위치는 1990년대 모래를 반입했던 함흥 성천강하구의 만 지역이었다.

2005년 5월에는 남북해운합의서가 채택됐다. 이에 따라 제3국을 통하지 않고 국내 선사가 직접 모래를 운송할 수 있게 됐다. 또한 2005년 8월에는 해주 모래 채취 작업을 위해 남측기술자가 북한을 방문해 직접 작업했다. 2005년 말부터는 두만강 모래도 반입됐다. 두만강 모래는 해주 앞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보다 불순물과 염분이 적어 품질이 우수했다.

북한은 2007년 3월 1일부터 남측 바닷모래 채취업체로부터 받는 사용료를 60%가량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모래가격 인상조치는 북한이 대내외 모래수급 사정을 면밀히 검토한 뒤 취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08 베이징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위해 모래 수출을 전면 금지할 예정이었고, 남한은 환경보호를 위해 모래 채취를 몇년째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모래가격을 인상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남한당국과 지자체는 북한산 모래의 가격 인상으로 반입에 문제가 발생하자 2008년 충남 태안 해역과 전북 군산 배타적경제수역 등지에서 모래 채취를 본격 허용했다. 해주산 모래의 반입이 2008년 3월 이후부터 20% 이상 감소했다. 2008년 북한산 모래반입량은 2007년에 비해 40% 이상 감소했다.

2008년 남한의 정권이 바뀌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2010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후 정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경협과 교류를 전면 중단시키는 5·24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북한산 모래반입은 전면 중단됐다. 대북 경협중단조치로 인해 모래수입업계는 210억원가량의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림산업 개성 석재공장 / 태림산업 제공

태림산업 개성 석재공장 / 태림산업 제공

북한 석재개발사업

1990년대 남북교류가 시작되면서 여러 석재회사가 북한의 석산 개발을 검토했다. 북한 석재는 국내 석재와 유사하고, 가격도 저렴할 것으로 예상됐다. 또한 당시 중국의 석재가공 기술이 낮아 품질이 좋지 않았고 원석을 반입해 국내에서 가공하는 경우 운송비 부담이 높아지는 문제가 있어 북한에 석재가공공장을 건설해 석재를 생산하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 석재 관련 협력사업은 진행되지 못했다.

태림산업㈜는 국내외 개발사업 전문회사인 호야씨앤티 계열사로 2004년 대북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2005년 북측의 조선개선총회사와 석산 개발에 합의했으며, 2006년 9월 북측의 아리랑총회사와 투자비율 50 대 50으로 남북 합영회사인 아리랑태림석재합영회사를 설립했다.

태림산업은 석산 개발과 공장건설에 295만달러(약 32억원)를 투자했다. 공장은 개성공단 밖 2㎞ 지점인 개성시 덕암리에 있다. 부지는 약 4만9600㎡(약 1만5000평)였다. 공장면적은 3300㎡(약 1000평) 규모로 2006년 9월 준공됐다. 석산은 평안남도 남포시 룡강지역의 석산, 황해남도 해주시 수양석산과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의 석산을 개발하기로 했지만, 운송거리 등을 고려해 우선 개성 장풍석산을 개발했다. 석재공장에서는 건축용 석재만이 아니라 조각품과 묘석을 제작하기도 했다. 경남대 임형준 교수(미술교육과)는 북한의 만수대 창작사 소속 조각가 7~8명과 조각작업을 했다. 2008년에는 마산 월영성당에 남북조각가가 합동으로 작업한 성모자상이 설치됐다.

개성에서 생산한 원석과 가공석재는 개성공업지구 내의 도로와 남북연결도로(경의선 도로)를 이용해 남측으로 운송됐다. 북측이 원석가격의 조정을 요구하고, 직원의 방문을 불허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8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가 연매출액 50억원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5·24조치로 사업이 중단됐으며, 사업중단 전까지 총 투자한 금액은 2000만달러(약 220억원) 가까이 된다고 한다. 북한석재개발사업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장운영을 위한 전력, 용수공급시설이 부족했고, 석산에서 공장까지의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공장운영에 어려움도 있었다.

그동안 광물자원협력사업이 본격화되지는 못했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경우 대규모 협력사업이 추진될 것이다. 북한의 광물자원 매장량이 일부 과장됐다 하더라도 북한의 광물자원 매장량은 상당한 규모이며, 경제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협력사업 시에는 전력,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건설비용을 포함해 경제적 타당성 여부를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