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북이 함께 만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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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함께 만든 북한 기독교의 상징

북한 교회가 자생적인 것인지 선전선동을 위해 북한당국에서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북한 정권, 특히 김일성이 기독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아버지(김형직)와 어머니(강반석)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본인도 어린시절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북한 봉수교회 / 사단법인 기쁜소식 제공

북한 봉수교회 / 사단법인 기쁜소식 제공

북한도 1950년대까지는 종교적 자유가 허용됐다. 이는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나 지지 기반이 취약해 종교세력을 포함한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6년 제정한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다른 사회주의국가와 다르게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명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후 미군에 대한 적대감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종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는 교육과 선전이 이뤄졌고, 1950년대 중·후반 종교시설 행사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60년대부터 가정에서 예배를 보는 가정교회는 허용했는데 60세 이상의 신자들은 제한 없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 가정교회는 500개 이상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인식도 좋지 않았다.

북한의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건립

종교활동이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1970년대부터다. 변화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선택으로 보인다. 1972년 미중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데탕트가 시작됨에 따라 서방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 교류가 시작됐다. 북한은 종교단체를 외부와의 교류에 이용했다. 1980년대 동서냉전 해체와 동유럽 민주화 운동의 본격화로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북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교류에 종교를 활용하기도 했다.

북한 칠골교회 / 정시춘 건축사 제공

북한 칠골교회 / 정시춘 건축사 제공

1990년대에 이르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과 외교적 고립이 가중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종교를 탄압한다는 국제적 비난의 근거가 된 헌법상 반종교 선전활동의 자유를 삭제했다. 이로 인해 종교의 국제적 교류가 확대됐다. 그러나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는 종교자 유보 장보다 대외정책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이 크다. 1992년 한중수교로 중국방문이 용이해지면서 한국기독교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선교사의 정치적인 행동이 문제가 됐다. 이는 북한이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중국과 갈등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북한의 종교 정책변화와 남북 종교교류에서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건립은 큰 의미가 있다. 북한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 광복거리를 조성했고,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했다. 기독교인들은 점차 가정에서 예배가 어려워졌다. 이에 김일성은 칠골교회 건립을 직접 지시했다. 칠골교회는 김일성과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가 다녔던 하리(下里)교회 터에 1989년 지어졌다. 1992년 재건축됐다가 2013년 개축됐다. 칠골교회는 반석공원(강반석의 이름을 딴 공원)에 있으며, 공원에는 강반석 여사 생가와 칠골혁명사적관이 있다. 주변에는 김일성 주석이 2년 동안 다녔다는 창덕소학교가 있다. 칠골교회도 봉수교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했지만, 남측 기독교인들의 방문은 잘 허용하지 않아 봉수교회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봉수교회는 북한 기독교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봉수교회는 평양시 만수대구역 건국동에 있으며, 1987년 착공해 1988년 준공했다. 부지와 건설자재는 북한당국이 제공했고, 신자와 해외동포가 모금을 해 자체적으로 건립했다. 교회부지는 약 8000㎡(약 2,420평)이고, 1층, 2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갖추고 있었다. 1988년 당시 북한 화폐로 50만원(205만달러)이 소요됐다. 첫 예배는 1988년 11월 6일 드렸다. 처음 신자는 300명 정도였으며, 평균연령은 50대 이상이었다.

칠골교회 계획안 모형사진 / 정시춘 건축사 제공

칠골교회 계획안 모형사진 / 정시춘 건축사 제공

북한지역 교회건립 위한 노력

1990년대부터 한국기독교와 국제기독교계에서는 북한지역에 교회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그리스도연맹(조그련)은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고, 500여개의 가정예배소가 있으므로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조그련은 교회건립에는 반대했지만, 외부의 각종 지원은 받아들였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조그련은 미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봉수국수공장을 설립했고 운영 관련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통합)에서는 1998년 봉수국수공장의 시설보수와 운영지원을 시작했다. 2002년에는 봉수교회부지에 1322m²(400평) 규모의 유리온실을 설치했다. 유리온실 준공 후에는 평양신학원을 건축했다. 특히 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기감서부연회)의 참가 참여 의지가 컸으며, 두 교단은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건축 관련 설계와 자재비 지원은 예장통합 측에서 하고, 학원 운영지원은 기감서부연회에서 하기로 합의했다.

2003년 4월 6일 예장통합 측 대표단이 평양신학원 건축 기공예배에 직접 참석해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함께 기공식 예배를 드렸다. 건축자재는 남측에서 제공하고 건축시공은 북측이 담당했다. 자재는 인천항에서 남포항으로 해상으로 운반했으며, 일부 골재도 남측에서 제공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기공식 후 약 6개월이 지난 2003년 9월에 건물을 완공했다. 공사비로 약 6억원이 투입됐으며, 건축면적 1125m²(340.5평)의 2층 건물이다.

예수교장로회 김용덕 장로와 조선그리스도연맹 강영섭 위원장이 봉수교회 개축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 사단법인 기쁜소식 제공

예수교장로회 김용덕 장로와 조선그리스도연맹 강영섭 위원장이 봉수교회 개축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다. / 사단법인 기쁜소식 제공

신학원 건립에 이어 2005년부터 한국기독교(예장통합) 측과 조그련 측은 봉수교회 재건축에 대하여 협의를 진행했다. 1989년 건축된 봉수교회는 건물이 노후화됐고, 규모도 작았으므로 개축할 필요가 있었다. 남측의 예장통합 남선교회 전국연합회와 북측의 조그련과 봉수교회 측이 2005년 5월 7일 재건축에 대해 협의했다. 9월 5일에는 남측의 홍희천 장로와 김용덕 장로, 북측의 강영섭 목사, 오 경우 목사가 기존 봉수교회를 헐고 새롭게 건축하기로 합의했다.

봉수교회는 2005년 11월 9일 신축 감사예배를 시작으로 기존 교회를 철거하고, 연면적 1983m²(600평) 규모의 교회 건축공사에 착수했다. 2006년 2월 1일 철골공사를, 9월 31일 콘크리트 공사를 완료했고, 11월 30일 상량감사예배를 드렸다. 당초에는 9월에 상량식을 하고 성탄절에 입당식을 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의 1차 핵실험의 영향 등으로 공기가 지연됐다. 2006년 11월 상량식 후에도 동절기, 2007년 여름철 홍수의 영향으로 공기가 지연돼 2007년 8월 30일에야 외부 석재공사가 완료됐다. 11월 3일 내부 인테리어공사와 냉난방 시공을 마무리했다. 12월 8일 음향, 영상, 성구 설치공사를 완료해 당초 계획보다 1년 이상 지연된 2007년 12월에 완공됐다.

2008년 4월 남북이 공동예배

신축 교회는 현대식으로 계획됐다. 화강석으로 외장을 마감했으며, 전면부 지붕에는 화강암 십자가를 세웠다. 내부의 벽면과 바닥은 대리석과 고급목재로 장식했다. 영상, 조명, 음향시설 등도 상당한 수준으로 갖추었다. 지상 3층의 건물 1층에는 사무실·당회실·접견실·성가대실·화장실, 2층에는 1000여개의 좌석, 3층은 200석 규모 좌석의 예배실로 건립됐다. 또한 내부에 승강기를 설치했고, 그랜드피아노, 40석의 성가대석, 대형 스크린과 촬영시스템을 비롯해 현대식 설비를 갖추었다. 약 33억원의 총공사비가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사 완료 후 2007년 12월 21일 입당식 감사예배를, 이듬해인 2008년 4월 6일 남북이 공동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7월 16일 건축 최종단계인 ‘헌당식 감사예배’를 드림으로써 모든 건축과정을 마무리했다.

현재 봉수교회의 주일 예배는 매주 오전 10시에 열리며, 북한 교인뿐만 아니라 북한을 방문한 관광객, 사업가, 외교사절과 북한에 주재하는 외교관, 국제기구 직원, 평양과학기술대학 교수·직원 등 외국인들도 참석한다고 한다. 또한 봉수교회의 북한 교인들은 평일 조별모임도 예배당에서 가진다. 현재 교인은 300여명으로 직분자로는 장로 9명, 권사 14명, 집사 5명이 있다. 신자들의 연령 분포를 보면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며 청년들은 거의 없고 여성이 70%를 차지한다.

봉수교회 준공 후 한국기독교에서는 칠골교회 재건축도 추진했다. 기존 교회가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기존 교회는 존치하고 부지 내에 추가로 교회를 건립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칠골교회 재건축사업은 추진되지 못했다. 남북관계의 어려움으로 2010년 이후 대부분의 교류가 중단됐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20년간 이어온 기독교계의 교류와 협력 경험은 향후 남북관계 개선 시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기독교의 협력과 교류를 위해서는 상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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