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월급은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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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대부분 보수 총액만 공시하고 구체적 산정기준은 안 밝혀

“대부분 기업이 이렇게 공시하지 않나요? 정부로부터 잘못됐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수십억원의 상여금을 그룹 회장에게 지급하면서 산정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에 한 기업의 실무진은 이같이 설명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업 대부분은 보수의 총액만 공시한다. 구체적인 산정기준은 언급이 없다.

지난 3월 17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제52기 정기 주주총회’. / 삼성전자 제공

지난 3월 17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제52기 정기 주주총회’. / 삼성전자 제공

오랫동안 한국 기업의 임원 보수는 비밀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국은 개별 이사의 보수를 공시했지만, 한국은 임원 전체의 보수 총액만 알 수 있었다. 임원 보수도 중요한 경영정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2013년 등기임원의 개별 보수가 공개됐다.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수감 중인 그룹 총수가 수백억원의 보수를 받거나 기업이 적자임에도 상여금을 받는 경우가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보수 공개를 꺼리는 총수일가가 등기임원에서 물러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2018년 공개 범위는 더 확대됐다. 등기 여부를 떠나 보수가 5억원 이상인 임직원 5명의 보수 내역을 공개하도록 자본시장법이 개정된 것이다.

임원 보수는 어떻게 결정되나

임원 보수는 크게 급여와 상여,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행사이익, 기타소득으로 나뉜다. 기업은 사업보고서를 통해 각각 항목에 대한 산정기준 및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먼저 급여를 보자. ㈜SK는 최태원 회장에게 23억원을 지급하면서 “2020년 이사 보수한도 범위 내에서 직책(대표이사), 직위(회장), 리더십, 전문성, 회사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기본급을 총 23억원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급여가 기본급 성격인 만큼 설명이 더 구체적이어야 함에도 대부분의 기업은 간략하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공시 내용만으로는 직무나 직급, 기여도 등의 항목별 구성비나 평가방법, 평가결과 등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보수는 실적과 무관한 만큼 총수일가의 보수에서 급여 비율은 다른 전문 경영인보다 높다. 경제개혁연구소가 2018년 자산 2조원 이상 비금융회사의 보수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총수일가의 급여 비중은 73.2%로 비지배주주(58.0%)보다 높다. 자산 2조원 미만인 경우에는 총수일가(81.8%)와 비지배주주(46.1%)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지난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롯데쇼핑과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에서 보수 42억1300만원을 전액 급여로 받기도 했다.

회사나 개인의 실적에 따라 달라지는 상여나 스톡옵션 등의 성과급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 등 몇몇 기업은 자기자본수익이익률(ROE)과 세전이익률, 주가상승률 등을 지급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 같은 수치가 상여금 규모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마저도 설명이 생략된 경우가 있다. 신세계는 정유경 총괄사장 등 임원들에게 최대 10억원이 넘는 상여금을 지급하면서 “어려운 대내외 경영환경 속에서도 영업이익 1268억원을 달성한 점을 고려했다”고만 설명했다. 각 회사가 이같이 내용을 간략하게만 공시해도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공시의 구체적인 산정기준과 방법을 공시하는 것을 회사 자율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임원 보수는 왜 공개를 해야 할까. 경제개혁연구소는 “임원들의 보수가 최고경영자나 총수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기업의 성과에 연동됐는지를 주주들이 판단하기 위해 공개하도록 했다”고 했다. 실제 미국은 1992년 상장법인 임원 보수 공시제도가 신설된 뒤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미국증권위원회(SEC)는 1992년 ‘보상위원회 보고서’와 ‘성과 그래프’를 도입해 임원 보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주가와는 어떻게 연동되는지 주주가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2006년에 ‘임원보상에 관한 토론 및 분석’ 항목을 신설해 보상 수준 인상과 인하를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단기 보상과 장기 보상의 배분 기준, 임원 개인의 성과와 그 성과를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리도록 했다. 애플이나 화이자 같은 글로벌 기업의 임원 보수 내역 분량이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이유다.

아무도 모르는 회장님 월급 기준

임원 보수 공개가 형식적으로 이뤄지면서 횡령 등으로 유죄가 확정된 총수일가의 보수가 상승한 경우도 있었다. 회삿돈 16억원을 횡령해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된 조현준 효성 회장은 보수가 2019년 45억1700만원에서 2020년에는 46억4100만원으로 상승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보수 환수 자체가 아니라 등기임원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문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회계 부정을 저지를 경우, 임원의 성과를 환수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미 증권위원회는 2010년 도드 프랭크법 제정 이후, 모든 상장법인에 임원 성과보수 환수 정책을 공시하도록 했다. 재무제표를 재발행할 경우에는 성과보수 환수금액 등도 알려야 한다. 미국의 4대 은행인 웰스파고 이사회가 ‘유령 계좌’ 스캔들을 일으킨 최고경영자(CEO) 존 스텀프에게 4100만달러의 보수를 토해 내도록 한 것도 이 같은 제도적 기반에서 이뤄졌다.

국내에서도 과도한 보수 지급을 막기 위한 법안이 다수 발의됐다. 2015년 대우조선해양 부실 사태에서 고액 성과급 논란이 제기되면서 보수 환수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등기이사나 대표이사의 경우, 5억원을 넘지 않더라도 보수를 공개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특히 이 법안에는 대주주 또는 그 특수관계인의 친인척이 회사 임직원으로 재직 중인 경우에는 현황을 공개하고 금액과 무관하게 보수 내역을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회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그동안 총수일가가 경영 성과와 상관없이 많은 월급을 받아도 이를 견제할 장치는 없었다. 사내 이사회도 이를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데 그쳤다. 보수 공개는 단순히 누가 얼마나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입된 것은 아니다.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른 임원들이 어떤 기준으로 받았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 기준에 부합하는지 주주들이 확인하기 위한 장치다. 기업 자율에 맡길수록 공시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면 이제 입법을 통해서라도 견제를 해야 할 시점이다.

<박상영 경제부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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