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을 통한 국위선양’ 옛날 얘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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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지난 8월 4일 통과됐다. 개정안 중 하나가 국민체육진흥법 목적에서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것이다. 국위선양 문구 때문에 메달·성적주의에 치중한 정책이 정당화됐다는 게 이유였다.

1962년 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에 1982년 ‘체육을 통한 국위선양’이 추가됐다. 당시 한국은 변방에 불과했고, 국가를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 존재를 알렸고, 국민 자긍심도 높아졌다. 그때 우리는 대부분 ‘국뽕’이었다.

고 최숙현 법안으로 불리는 국민체육진흥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지난 8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고 최숙현 법안으로 불리는 국민체육진흥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지난 8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은 굳이 한국을 알릴 필요가 없다. 이전 선수들이 애국심이 상대적으로 강했다면 지금은 개인 성취욕이 훨씬 앞선다. 올림픽·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연봉도 더 받고 외국 진출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성적을 내면 함께 기뻐하고 뿌듯해한다.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박찬호가 호투했을 때, 박지성이 펄펄 날 때 그랬다. 손흥민이 골을 넣을 때, 류현진이 승리투수가 될 때도 그렇다. 그들이 국위선양을 했기에 우리가 기뻐했나.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자신감, 자긍심, 최소한 순간적 뿌듯함을 줬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 기쁨은 더 컸다.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라는 책이 지난 3월 출간됐다. 세계적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60년 안팎 인간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정리했다. 케이건은 ‘스키마(schema)’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 스키마는 어떤 사건·사물에 대해서 인간이 선험적으로 사고하는 틀을 뜻한다. 같은 사물이라도 스키마는 다르다. 기차 사고를 목격한 사람에게 기차는 두려운 존재인 반면 여행가에게 희망이다. 다리는 누군가에는 이별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누군가에는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곳으로 기억된다. 즉 스키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기억 속 인식 체계다. 스키마를 사실로 착각해 스키마에 맞춰 논리를 방어하거나 합리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금 50·60대 소위 사회지도층은 과거 자신들이 경험한 학교운동부, 운동선수에 대해 어떤 스키마를 갖고 있을까. 소위 ‘돌대가리’들이 운동으로 대학에 가려고 모인 집단? 공부는 안 하고 엎드려 잠만 자는 지진아? 술·담배를 하고 싸움질이나 일삼은 문제아? 물론 과거 운동부가 그런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공부를 잘하는 운동선수도 적잖다. 일반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잔다. 음주·흡연도 일반 학생들이 더 많이 한다. 현장의 변화를 모르고 과거 스키마에만 사로잡히면 안 되는 이유다.

국위선양은 원래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이다. 선수가 잘했기 때문에 메달을 딴 것이고, 그래서 국가 이름이 더 거론될 뿐이다. 요즘 운동선수의 뇌리에는 국가 공헌, 팀 발전보다는 개인 성공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게 불굴의 의지, 포기를 모르는 투혼으로 발현된 것일 뿐, 국위선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면서까지 초인적 힘을 낸 게 아니다.

국위선양이 빠지면서 들어간 문구는 ‘공정한 스포츠 정신으로 체육인 인권 보호’, ‘국민 행복과 자긍심을 높여 건강한 공동체 실현’ 등이다. 법 개정에 앞장선 이들이 책임감을 갖고 구현해야 하는 세상이다.

<김세훈 스포츠산업팀 기자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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