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홀리데이 「Strange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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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
포플러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들

[내 인생의 노래]빌리 홀리데이 「Strange Fruit」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는 황학동 풍물시장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아버지는 이른바 ‘빽판’이라고 부르는 복제 LP판을 구입해 그때는 흔했던 진공관 앰프로 음악감상을 하시곤 했다. 그 덕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록은 물론 클래식,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하면서 고교 시절에는 방송반에서 DJ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10대를 넘기고 대학에 진학한 후 운동권 언저리에 있다 보니 탈춤과 운동가요를 배우면서 선배들의 강요 아닌 강요로 록과 재즈는 양키문화의 온상이자 퇴폐문화로 간주해 멀리했다.

뜨거웠던 시절이 지나고 나이가 들자 다시금 재즈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그중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마음이 갔다. 빌리 홀리데이는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과 함께 1940년대를 풍미한 재즈 디바로 이름을 떨쳤지만 굴곡진 인생을 살다 갔다. 매춘부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창부가 되면서 학대를 받았고, 감옥 생활까지 했다. 불행을 떨치기 위해 세 번 결혼했지만, 남편들이 모두 막장이어서 고생만 죽도록 했다. 결국 알코올과 약물중독으로 44세로 삶을 마감하자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가 죽어서야 진짜 행복해졌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가수가 된 것도 극적이다. 대공황으로 일자리가 없어지자 밀린 방세 때문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는 할렘가에 있는 나이트클럽 지배인에게 댄서라고 속이고 일자리를 청했지만, 즉석 오디션에서 면박만 받았다. 그걸 가엾게 여긴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가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빌리는 절박한 마음에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자 클럽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삶의 밑바닥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그에게 재즈 디바로서 명성을 안겨준 곡이 바로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다. 노래는 원래 뉴욕 브롱크스 출신 유대계 교사이자 시인인 아벨 미어로폴이 1930년대 중반 백인들에게 살해돼 나무에 매달린 흑인들의 시체 사진을 보고 지은 시 ‘쓰디쓴 열매(Bitter Fruit)’에 음악가 얼 로빈슨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이상한 열매>는 저항가요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939년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면서 유명해졌다. 처음 곡을 접했을 때 빌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은 자신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노래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자 클럽에서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 어떤 백인 여성은 “그 노래 있잖아요. 왜 검둥이가 나무에 매달려 죽는 섹시한 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시절 흑인들이 처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해프닝이다.

가창력에서 있어서는 엘라 피츠제럴드에 못 미쳤고, 음색의 아름다움은 사라 본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인생의 한을 담아 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아냈던 빌리 홀리데이. <이상한 열매>는 재즈가 충분히 사회성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곡으로 늘 내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

〈백찬홍 (사)에코피스아시아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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