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꾸던 시절, 달콤하고 슬픈 속삭임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ese places had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
![[내 인생의 노래]비틀스 「In My Life」](https://img.khan.co.kr/newsmaker/1379/1379_70.jpg)
원고 청탁을 받으며 당황했다. 한 번도 인생노래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음치라서 ‘18번’도 없고, 듣는 노래도 금방 식상해하는 나는 인생노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노래가 있다. 바로 비틀스의 <In My Life>다.
그 노래가 내게 강하게 박힌 것은 1990년대가 시작되던 추운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그때는 왠지 그 길을 가야만 할 것 같았고, 학생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인천의 한 월세방에서 TV도 없이 지내던 내게 놀라운 뉴스가 들려왔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민중봉기로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했으며, 한국에서는 3당 합당이 있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그때 그 춥던 작은 방에서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선택한 그 길이 과연 현실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고 또 들었다. 그렇게 혼란스럽던 그 무렵 추웠던 날 나는 집에 들렀다가 비틀스의 앨범을 듣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귀에 꽂히는 노래가 있었다. 제목을 찾아보니 <In My Life>였다.
노동계급과 혁명을 꿈꾸던 그때 내게 이 노래는 유혹처럼 달콤했고, 또한 슬펐다. 조직보다 너 자신이 더 소중하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는 극심한 생활고와 주변 조직의 붕괴에 따른 위험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결국 그해 가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노래가 다시 내게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초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를 읽을 때였다. 그 소설의 제목은 비틀스의 <Norwegian Wood>에서 따온 것인데, 그 노래가 수록된 ‘Rubber Soul’ 앨범에는 <In My Life>도 함께 수록돼 있다. 그 무렵 두 노래를 자주 들었다. 두 노래는 유혹처럼 달콤하고 슬펐을 뿐만 아니라 그리움처럼 먹먹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의 분위기, 특히 ‘상실의 시대’의 여운은 내게 <In My Life>라는 노래에 덧붙여졌다. 그것은 거대서사를 잃어버린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가 주는 무기력함인 동시에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약간은 무책임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열망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이 노래를 찾아 듣게 된 계기가 생겼다. 일본영화 <골든슬럼버>를 보고 나서다. 이 영화는 비틀스의 노래 <Golden Slumber>를 소재로 쓴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한국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는데, 나는 일본 원작이 훨씬 좋았다. 영화를 보면서 일본 사람들은 비틀스를 정말 좋아하고, 특히 숨겨진 노래를 찾아서 소설이나 영화로 만드는 것을 멋으로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Norwegian Wood>도, <Golden Slumber>도 비틀스의 숨겨진 노래였는데, 내게는 <In My Life>가 그랬다. 남들은 잘 모르는 비틀스 노래에 나만의 숨겨진 사연을 가지고 있는 묘한 스릴이라고 할까?
글을 쓰며 이 노래를 다시 들었다.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일까? 이제는 밋밋한 느낌이다. 삶이 닳아지듯이 노래도 그렇게 닳아지는 것 같다.
<유창오 민주당 대표실 부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