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수당’ 전도사 박경철 “식민지 농정 이제 끝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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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을 정체불명 ‘빼빼로데이’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날은 엄연한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이다. 그러나 잔칫날이어야 할 이날 농민들은 상복을 입었고, 박근혜 탄핵에 앞장선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부대가 다시 등장했다.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장 박행덕)이 주최한 ‘전국 농민 총궐기 대회’에는 농민 1만여 명이 참가해 정부를 규탄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농민수당’ 전도사 박경철 “식민지 농정 이제 끝내야”

이렇게 농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정부가 10월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도국 지위 포기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농산물 수입관세가 낮아져 외국산 농산물이 물밀듯 밀려온다. 게다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까지 타결되면서 중국·호주·뉴질랜드 등 농업 강대국 농산물이 대거 들어온다.

이렇게 위기에 놓인 농촌문제를 풀 유일한 해결책이 ‘농민기본소득’ 혹은 ‘농민수당’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일부 지방자치단체에 도입됐고,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가 12월 19일 출범할 예정이다. 충남연구원 박경철 박사(49)는 오래전부터 전국을 돌며 ‘농민수당 전도사’를 자처해왔다. 지난 11월 15일 그를 만났다.

‘농민의 날’에 상복 입은 농민들

-최근 백남기 농민 4주기를 맞아 ‘백남기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그 자리에 여러 농민단체 지도부가 참여했는데, 의외로 현 정부의 농정에 대한 분노가 높더라. 사업회 초대 이사장이 된 정현찬 전 전농의장은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권보다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가졌지만, 그 희망이 분노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 농민이 분노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주요 20개국(G20)에 들어갈 정도로 경제선진국이지만 농업부문은 굉장히 열악하다. 우리는 소농 위주다. 외국과 경쟁 자체가 안 된다. 그래서 WTO에도 분야별 관세부과에 차등을 두고 있다. 우리가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쌀 수입관세가 513%에서 154%로 낮아진다. 값싼 미국·중국·동남아산 쌀이 대거 들어올 것이다. 중국은 질 좋은 동북미를 우리나라에 수출하기 위해 이미 다롄에 선적항까지 다 만들어 놨다. 우리는 해충 반입 등을 이유로 사과 수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것이 풀리면 우리 과수농사는 모두 망할 것이다.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우리 농업은 소수 친환경·직거래만 남고 모두 사라질 것이다.”

-정부가 면밀히 수출입 품목을 검토해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

“이번 WTO 개도국 포기 결론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90일 이내에 결정하라’고 압박했다. 미국은 우리를 먼저 쳐야 중국과 인도 관세장벽을 철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WTO 개도국 포기 카드를 사용했다. 마치 ‘방위비 더 낼래, 농업 포기할래’를 요구한 것이다. 그 압박에 우리는 농업을 포기한 것이다.”

-정부 결정에 농민단체들이 대책위를 구성하고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 정부 대책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하나.

“정부는 아직 완전한 대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식량안보 등에 필요하다면 ‘민감품목’ 등으로 지정해 약간 관세를 올릴 수는 있다. 쌀은 393%까지 올릴 수 있다. 정부는 이 점을 고려하는 것 같은데, 대신 의무적으로 쌀 수입 비율을 높여야 한다. 사실 그게 그것일 수 있다.”

어차피 값싼 농산물 수입은 피할 수 없는 ‘외통수’ 같아 보인다. 그에 맞서 우리 농업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문제는 애당초 외국과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 농민의 72.6%가 농지면적 1㏊ 미만이고, 평균 1.37㏊다. 이에 유럽은 평균 40~50㏊, 프랑스는 70㏊에 이르고, 미국은 82㏊, 호주는 373㏊에 이른다. 애당초 규모나 생산성에서 경쟁이 안 된다. 우리보다 평균 경작면적이 30~40배 큰 유럽조차 농업경쟁력을 잃고 각종 직불금으로 농촌이 유지되고 있다. 박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 농민도 다 어려워 정부가 직불금을 준다. 그러나 유럽은 농가당 평균 경작면적이 크기 때문에 직불금만으로도 기본소득이 가능하다. 여기에 친환경·경관 직불금·생물종 다양성 농업을 하면 허용보조를 더 받을 수도 있다. 독일도 우윳값이 물값보다 쌀 정도다. 모두 축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직불금 주고 친환경 목축을 하면 추가 보조가 있어 축산이 유지된다. 서구의 목가적인 농촌풍경은 모두 직불금, 정부지원 때문에 가능하다. 유럽연합(EU) 전체 예산의 40%가 농업예산이고, 그중 72%가 농업직불금으로 나간다. 스위스는 농업예산의 85%를 아예 농민에게 직접 준다. 이들은 농촌을 자연, 혹은 힐링 공간 등으로 보존하면서 얻는 무한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농민 72.6% 연 평균 직불금 겨우 40만원

우리나라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도입된 직불금제도가 있다. 박 박사는 “직불금을 면적단위로 주다보니 상위 12%의 농가가 전체 직불금 절반을 가져간다”면서 “1㏊ 미만 농가가 전체 농민의 72.6%인데 이들이 받는 연간 평균 직불금이 40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년에 40만원 수입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직불금제도에는 크게 ‘허용보조’와 ‘감축대상보조’ 두 가지가 있다. 허용보조는 환경·생태농업에 보조하는 것으로 무한정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축대상보조는 쌀 변동직불금처럼 가격정책에 따라 큰 차이가 나고, WTO 개도국 지위가 사라지면 이 부분이 대폭 줄어든다. 그는 “농민들은 쌀값 폭락 시 대책없이 변동직불금을 없애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1990년대 초부터 농민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중국(베이징대)에 유학할 때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2014년 충남연구원에 ‘농민기본소득연구회’를 만들어 이를 본격 연구했다. 아마 그는 농민수당, 혹은 농민기본소득 제도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농민수당이냐, 농민기본소득이냐를 놓고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보는 시각에 따라 약간 다르다. 전농·민중당은 농민수당이라고 쓰는데 이는 농업의 본래적 가치, 사회적 기여도를 감안해 당연히 받아야 할 ‘수당’으로 표현하고, 농민기본소득은 WTO와 도시화·개방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정에 대한 생존권적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기본소득’이라고 쓴다. 그러나 학술적 용어와 대중적 용어 차이일 수도 있다.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이라면 잘 이해가 안 돼 그냥 ‘수당’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기본소득 원칙과 정신에 입각해서 쓴다.”

-이미 일부 자치단체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했다. 그리고 내년부터 많은 자치단체가 이를 도입하기로 했다. 농민수당 도입역사는 어떤가.

“2018년부터 전남 강진에서 농업인경영안정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연 70만원을 지원했다. 전남 해남은 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지원조례를 제정해 논·밭·임업인까지 지원한다. 일부 자치단체는 농·어가에 지원한다. 전남·전북·충남·강원 등이 내년부터 도입하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다.”

11월 8일 국회에서 황민영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 위원장, 하승수 전 녹색당 운영위원장, 박경철 박사 등 참가단체 관계자들이 결성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1월 8일 국회에서 황민영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 위원장, 하승수 전 녹색당 운영위원장, 박경철 박사 등 참가단체 관계자들이 결성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기도가 농민기본소득을 내년 6개 시·군, 2021년 15개 시·군, 2022년에는 31개 전체 시·군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게다가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그렇다. 농민기본소득은 개인에 대한 권리로 개인에게 직접 주는 것이 취지에 맞다. 지금까지 농민수당은 모두 ‘농가당’으로 지원해 농촌 여성·청년이 소외됐다. 그래서 농민 개인 모두에 주겠다는 이번 경기도 결정은 획기적이다. 지금까지 농가에 주면 관리하기 쉽고 행정적으로 편해 그리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별도 소득이나 실제 경작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부정수급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농민수당을 지역화폐로 주자는 주장이 있다. 또 농촌 소상공인과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지역화폐로 주자는 것은 ‘신의 한 수’처럼 좋은 아이디어다. 시골에 가면 농민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도 매우 어렵다. 농촌인구의 30%만 농민이고, 70%는 비농민이다. 농촌의 소상공 자영업자는 지역화폐로 주는 것을 크게 반긴다.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지역화폐를 주는 것이 좋다.”

-농민기본소득을 개인 모두에게 주겠다는 경기도의 결정은 재정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재정력이 약한 지방정부는 재원 마련이 어렵다. 결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도입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자치단체 재정력도 중요하지만 단체장의 철학과 의지도 중요하다. 정부도 지금까지 ‘생산주의 농업’에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농업의 공익·다원적 가치, 즉 식량안보나 생태·환경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공익형 직불제로 전체 농가의 45%를 차지하는 0.5㏊ 미만 농가에 월 80만~100만원 정도를 기본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이뤄질 지 기간과 예산확보가 관건이다.”

박 박사는 1970년 전북 고창 출신이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의 무장기포가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 부모 모두 농사꾼이다. 전주 상산고를 나와 1989년 건국대 농학과에 입학했다. 농대 학생회 간부로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농업부문)으로 중국에 파견돼 베이징대와 다롄 농업과학연구소에서 2년간 공부했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중국 베이징대에 가서 2012년 박사학위(사회학)를 받았다.

농업에 쓴 수백조원은 다 어디로 갔나

귀국 후 충남연구원 ‘농촌농업연구부(현 지역도시문화연구실)’에 들어가 현재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그러니까 그는 대학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농업·농촌 연구에만 매달려온 셈이다. 요즘에는 시간만 나면 전국을 돌며 농민수당 도입 필요성을 설명하는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쌀시장 개방을 시작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살린다며 정부는 수백조원 이상 예산을 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은 살기 힘들어하고, 농촌에 빈집은 늘어난다. ‘지방소멸’ 얘기가 나오고 농민은 트랙터를 몰고 아스팔트를 달린다. 대관절 농업을 살린다며 쓴 수백조원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박 박사는 농정에 대한 지금까지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극도로 영세한 우리 농업은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 그동안 농촌 소득증대 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등은 20%의 농민에게만 혜택이 돌아갔고, 이마저 경쟁력을 잃고 빚으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정예산은 비료·농자재 업자, 농업 관련 기관들이 차지했다. 이런 가운데 농민의 80%는 정부지원에서 소외된 채 사실상 방치됐다.

그는 “되지도 않는 농업경쟁력 운운하는 생산주의 농정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면서 “유럽처럼 농업예산의 72%, 스위스처럼 예산의 85%를 직접 농민에게 줘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우리 농업예산은 15조원 정도로 농가당 월 50만원, 170만 명에 이르는 농민당 20만원만 월급방식으로 주더라도 5조~6조원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부부 합해 월 90만원 정도면 농촌에서 버틸 힘이 된다”면서 “예산이 없어 못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농업예산의 35%만 농민수당으로 쓰면 농민이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이 해결책을 왜 못하는 것일까. 그는 ‘식민지 농정방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힐난한다. 박 박사는 “말 잘 듣고 빽 있는 농민이나 단체가 예산을 차지하고, 예산으로 농민을 통제하려는 방식은 전형적인 식민지 관리 농정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는 농업 관련 기관·단체·공무원이 너무 많아 농정예산 상당액이 이들 차지가 된다. 힘없는 농민에 ‘기생’하는 탐관오리가 많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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