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피해자 가족의 질척함과 간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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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으로 얽혀 죄책감과 측은지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소망

2005년 2월부터 만 4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동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전국적으로 피해신고를 받고 사실관계를 따진 후 피해자 심의조서를 쓰는 일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됐지만 사망·행방불명자의 경우 조사가 힘들었다. 위안부 피해 여부를 따지기 위해 의지했던 것이 생존자 구술이었는데 사망·행방불명자의 경우 직접 구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401차 정기 수요집회 참가자가 눈물을 닦고 있다. / 김동성 기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401차 정기 수요집회 참가자가 눈물을 닦고 있다. / 김동성 기자

남은 가족들은 피해자가 사라졌던 시기와 정황, 그리고 돌아와서 불행하게 살았다거나 성병으로 의심되는 증세가 있었다거나 등을 전하는 외에는 그 피해를 입증할 만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피해를 입증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매우 답답해했다.

가족들은 ‘나라(강동위)’에서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을 ‘명예회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들은 ‘위안부(일지도 모르는)’ 가족 구성원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고 호소했다. 한 여동생은 언니가 위안부였다는 소문으로 인해 자신이 파혼을 당했다고 했으며, 어떤 올케는 시누이가 싱가포르를 다녀온 뒤에 시아버지가 동네 부끄럽다며 평생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했다.

“내가 누나를 위안부로 보냈어요”

<제국의 위안부>나 <반일종족주의> 같은 책들은 일본보다 딸을 판 부모가 더 나쁘다며 일본이 가해자가 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백번 양보해서 이 말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모가 딸을 파는 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식민지 호주제’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와 가족의 관계가 그렇게 쉽게 피해 아니면 가해 구도로 놓을 수 있을 만큼 간단치도 않다.

‘질척함.’ 아직은 이보다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애증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죄책감과 측은지심으로 놓지 못하는 그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해 말이다. 2006년 정을순(가명·1914년생)의 남동생이 강동위에 찾아왔다. 큰 키에 허리가 꼿꼿했던 그는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매우 정정해 보였다.

“내가 누나를 위안부로 보냈어요.” 그가 나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누나는 28세 때인 1942년쯤 끌려갔다고 했다. 누나는 이혼 후 친정에 있고 동생은 대전의 헌병대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50세가량의 서울 남자가 누나와 함께 헌병대를 찾아와 동생을 불러냈다. ‘조선군 촉탁증’을 내보이면서 누나를 간호부 보조로 데려가려 하니 호주인 동생의 도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누나도 간호부가 되고 싶어해 동생은 도장을 찍어줬다. 그 남자를 따라가는 것을 본 것이 누나가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해방 후 몇 개월이 지나 돌아온 누나는 북중국의 군대 전용 장소에서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생은 누나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나는 중국에서 병까지 얻어 몸이 쇠약했다. 결국 한국전쟁 중에 세상을 등졌다.

이야기를 하는 동생의 모습은 온화했으나 말하는 사이사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누나를 위안부로 보냈다”는 말조차 담담해서 그 말의 무게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피해에 대해 누나에게 더 물어보지 않은 것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나름 속죄의 의미도 있었을까. 그는 누나가 꼭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김나미(가명·1922년생)는 제적등본에 1944년 9월 대만의 신마치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지는 일본 경찰이 관리한 유곽의 주소와 일치했다. 하지만 군 지정 위안소라는 사실을 밝혀낼 길이 없어 피해자라고 쓰기가 어렵다고 그의 가족에게 전했다. 그러자 남동생은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김나미의 가족은 1997년에 캄보디아에서 이남이(일명 훈 할머니)가 발견됐을 때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김나미와 이남이, 이름이 비슷해서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불일치로 드러났다. 사회적 관심도 당연히 사그라졌다. 이후 가족들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김나미가 전쟁 당시 끌려가 성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만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그 문제를 다시 들추는 것을 원치 않았다.

“끌려갔는데 어째서 피해자가 아니냐”

동생은 누나가 끌려가는 것을 직접 봤다고 했다. 여섯 살쯤인 1942년께 온 식구가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동네 구장과 순사가 집에 들이닥쳤다. 구장은 미혼자는 가야 한다며 수첩에 무엇인가를 체크했고 김나미를 끌고 갔다. 항의하러 주재소에 갔던 아버지는 하룻밤 동안 잡혀 있어야 했다. 수소문 끝에 ‘여자들이 부산 어디엔가로 갔다’는 말을 들었고, 1944년에 주재소를 통해 누나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족들은 해방 후 김나미의 소식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끌려갔던 여성 2명이 돌아와 ‘남방지대의 군부대’에 있었다고 전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 채 남쪽의 섬나라로 끌려갔던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이들은 김나미가 어느 날 군인에게 불려나간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들은 탓에 동생은 김나미가 대만의 유곽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을 믿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군부대나 군인이 너무나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대만 신마치 유곽에 아무런 제재 없이 드나들었다는 전 일본군 출신이 쓴 전쟁체험기도 있다. 다만 공문서 상에서만 김나미와 관련해 군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뿐이다.

나는 피해자로 쓰기에 여건이 충분치 않다뿐이지 김나미가 피해자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동생은 몹시 낙담하고 슬퍼했다. “끌려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피해자가 아니냐”고 반문하며 꼭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아 누나의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여성사 연구를 수렴하지 않은 ‘위안부 문제 정쟁’은 공창과 위안부를 경계 짓고 그 둘을 경쟁시키면서 모두에게 모멸과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전시체제기에 저항할 수 없는 공권력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해방 뒤에도 그 잃은(잃었던) 가족으로 인해 주위와 불편한 관계를 견뎌야 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가족 되기’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고 스스로도 위로받으려 했지만 그들은 돌아오는 질문 앞에서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감히 짐작컨대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이 아닐까. 특정한 피해자가 계속 나오는 원인을 파헤치고 그 가해구조를 완전히 해체해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살고자 애를 쓰다 죽음에 이른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자세가 아닐까. 가족이 일본보다 더 나빴다 탓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공격하는 것은 너무나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다. 위안부 문제를 얘기하면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일까.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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